그는 목표지향적이고 목표를 향해 오랜 기간에 걸쳐 연구하여 준비한다. 1961년에 들어 박정희 대통령과 국가재건최고위원들 앞에서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유공장 건설의 결정을 얻어 낸다. 조심성 있는 정부 관료들의 우려와 반대는 넘어야 할 장애였다.
석유 메이저와 이들을 업은 KOSCO로부터는 정유공장이 들어설 옛 조선석유 울산부지를 얻어 내야만 했다. 정유공장 건설업자로 선정된 플로어(Fluor Corporation)와는 힘든 합의를 통하여 그들의 건설추정비로부터 1,000만 달러 이상의 건설비를 삭감, 조정하였다. 이런 성과는 철저한 준비의 받침이 없으면 얻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플로어도 건설비 삭감에는 불만이 있었으나 남편의 능력과 회사를 위하는 열정에는 존경을 갖게 되었다.
하나의 조직이 분명한 목표를 갖고 그 목표와 가치를 공유하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하나의 이상이다. 현실에는 그러한 조직이 있기 어렵다는 얘기다. 더욱이 유공처럼 정부가 임명한 임원진과 일부 공채 사원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연고에 의하여 입사한 군 출신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신설회사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정치성이나 사교성이 부족한 남편이 주어진 일정에 맞추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얼마나 다른 임원진이나 타 부처 직원을 배려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자명하고 기술계 간부와 실무진 만이 그를 지지하고 따랐을 뿐이다.
남편의 곧이곧대로의 말버릇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약혼 시절의 어느 날 우리는 경복궁 담을 연해 걸어가고 있었다. 낭만적인 산책으로 보일만한 계제였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얼굴을 만들 때 하나님이 잠깐 졸았나봐.”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내 얼굴이 못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무슨 생각으로 그때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놀리고 싶었는지, 농담을 하고 싶었는지. 어쨌건 어이가 없어 나는 실소하고 말았으나 그때 그 말은 생전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아 있다. 만일 남편이 조금만 정치성이 있고 외교적인 언사를 사용할 줄 알았다면 유공에서 고생을 덜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그를 받쳐준 것은 일에 대한 열성과 신념, 그리고 강인함이었다.
그의 얼굴도 못 보고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남편에게만 매달리지 않고 내 일, 내 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 큰 구원이었다. 또 태어난 아이들의 존재도 기쁨과 축복이었다.
수현이와 수용이
아이들은 걱정을 끼치거나 속 썩이는 일 없이 자라주었다. 큰 딸 수현이는 어려서부터 속이 탁 트이고, 좀 엉뚱한 데가 있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몇 개 안되는 부족한 어휘를 가지고 상황을 설명하는 면을 보였다.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수현이를 업고 길을 가시다 빙판 길에서 털썩 엉덩방아를 찌셨다. 순간 등에 업힌 애가 “아머니 안지(할머니 앉았다)” 했다. 할머니가 덜컥 앉았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엉덩이의 아픔도 잊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이화여대 부속국민학교를 다녔다. 당시 이숙례 교장은 입시 경쟁 위주의 교육이 아닌 자유로운 교육을 원칙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분이었다. 수현이가 입학한지 얼마 안 되어 나는 학교를 찾아갔다. 애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복도에 서서 교실 안을 들여다보니 수현이가 자리에 없는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기를 조마조마 기다린 끝에 나는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수현이가 안 보이는데요.”
선생님은 태연히 “그네를 타러 갔어요.” 하는 것이었다.
“아니 수업시간인데 웬일이예요?”
“노는 시간에는 그네가 만원이라 탈수 없어서 수현이는 수업시간에 타러 나가요.”
“아니 공부는 안 하고 어쩌려고.”
“실컷 타고 나면 들어올 거예요.”
이병숙이라는 이름의 그 선생님의 말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린이에 대한 이런 이해가 있다면 정말로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신뢰와 감사로 마음이 그득해졌다.
둘째 수용이는 조용하고 섬세한 아이였다. 생후 6개월에 떼어놓고 미국으로 떠난 뒤 1년만에 돌아온 날 나는 몽매에도 잊지 못했던 아기를 받아 안았다. 아이는 두 팔로 내 목을 감싸 안더니 다시 고개를 젖히며 내 얼굴을 곰곰이 들여다 보았다. 누구인가 기억해내려고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내 목걸이를 당겼다. 목걸이가 끊어져 알이 후드득 떨어지자 아이는 민망한 표정과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서 우는 것이었다.
당시 이화여대부국은 간단한 테스트를 치고 들어가는 제도였다. 수용이가 친 테스트는 이목구비가 모두 갖추어진 것, 눈 하나가 없는 것, 입이 없는 것, 코가 없는 것, 이렇게 4가지 얼굴이 그려진 그림 중에서 완전한 것을 고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용이는 눈이 하나 없는 얼굴을 골랐다. 팔이 안으로 굽는 나의 판단으로는 그 애의 지적 수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림책이나 만화에 한 쪽 눈이 가려진 얼굴들이 얼마든지 있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오답을 골라 떨어진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봐 나는 거짓말을 했다. “넌 아직 어려서 선생님이 좀 더 있다가 오라고 하셔.”
이 아이를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이숙례 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리가 하나 났으니 등록을 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났다. 언니 수현이와 함께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수용이의 현재를 생각할 때 어린이의 싹을 시험으로 선별하는 불합리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송미와 승빈이
송미는 수용이보다 여섯 살 아래이고, 승빈이는 송미보다 두 살 아래이다. 위의 두 아이와 밑의 두 아이들은 역연한 세대 차이를 보여서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두 언니들은 이를테면 모범생이어서 공부도 잘 하고 말도 잘 들었으나, 밑의 아이들은 조금 달랐다.
송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나는 참관일에 학교에 찾아갔다. 선생님이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손을 들라고 하고 있었다.
“엄마가 자기를 예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봐요.”
어이없게도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든 애가 송미였다. 언니들에게서 송미만 예뻐한다고 소리를 듣고 있던 터에 이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계속해서 선생님이 물었다.
“이 담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송미가 또 손을 들고 말했다.
“난 크면 밖에 안 나가는 엄마가 될래요.”
나는 크게 한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송미는 언니들과는 달리 모양내기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이화여대 영문과로 가라니까 가긴 했으나 대학원은 끝내 홍익대 실내장식과로 가고 말았다. 미국 유학도 건축과로 가라는 아버지의 권을 어기고 프렛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의 실내장식과로 갔다. 지금도 남편은 기회만 있으면 “내 말을 안 들어서......”라고 불평을 한다. 그래도 송미는 자기가 택한 길에 후회하는 기식이 별로 없다.
성빈은 겉으로는 조용하고 얌전하지만 속엔 강한 데가 있는 아이였다. 중학교 때 하도 공부를 안 해서 성화를 하는 내게,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교육제도에서 공부는 해서 뭘 해요?”
네 말이 옳다고 해야 할지, 한 대 쥐어 박야야 할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성빈도 이화여대부속초등학교 들어갔으나 6학년 때 청운국민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중학교를 제비뽑기로 가는 제도가 실시되고 있던 때였다. 집 근처 학교로 배정될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성빈이가 추첨해서 들어간 중학교에 다니면서 불량스러운 반 친구에게 돈을 강탈당하기도 하고 또 말을 안 들으면 몰매를 때린다는 협박도 받았던 모양인데, 그 당시에는 부모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 그 악동들을 설득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사실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나중에 알았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것은, 성빈이 나쁜 친구를 사귀거나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은 것이다.
광운공대에 들어갔다가 미국 위치타대학에 가서 석사를 하고 지금은 버젓이 일가의 가장이 되었으니, 그렇게 공부에 상상할 일도 아닌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