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상관
그는 유공을 떠난 다음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을 만들어 한국의 기술 신장을 도모하는 한편, 세계시장으로 우리 기설을 전파하는 일에 골몰했다. 그 일을 하면서 그의 마음을 가장 크게 차지했던 아이디어는 엔지니어 육성이었다. 사실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을 운영할 때 어쩌다 회사에 가보면 회사라기보다 학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은 교실이고 사원들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공장 설계를 위한 기본 개념부터 공장의 레이아웃, 건설비 인건비 계산, 도면 작성 등 구체적인 일을 배우면서 해외로 나가 실험처럼 공장들을 세우고 운영해 나갔다. 그들 모두가 남편 못지않게 일에 열성적이었고, 충실했다. 이런 분위기는 개인 기업체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 성과는 큰 것이어서 후일 전엔지니어링 사원을 지낸 이력은 세계에서 하나의 자격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의 이상주의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이 정부 정책의 규정에 의해 억울하게 문을 닫게 되고, 그동안의 노력이 보람도 없이 빈손 들고 나와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드러났고, 하나의 도움이 되었다. 10여년을 공들인 사업이 일시에 무너져 사업을 접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정신적으로 받을 타격을 걱정했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키워나간 사업이었던가. 얼마나 애지중지 만들어 낸 회사였던가. 얼마나 닦달을 해가면서 길러낸 기술자들이었던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세운 사옥이었던가.
그 모든 소중한 업체를 대우에 고스란히 대우에 넘기고 나올 때 나는 그가 쓰러질까 겁이 났다. 그러나 말수가 적어진 것 말고는 그는 의외로 태연했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 표정도 여전했다. 나는 그가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저렇게 태연을 가장하는가 하고 의심도 해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그의 태연함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세속적인 성공이나 물질적인 소유에 치중하지 않고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난 다음 그는 지치지도 않고 다시 전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개설했다.
엔지니어링보다 스케일이 더 큰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을 이 조그만 회사에 굳이 붙인 그의 고집은 쓴 웃음을 자아낼 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큰 좌절에도 불구하고 석유공사를 비롯한 여러 기업체를 인생의 이정표로 보아 넘길 수 있는 그는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는 어찌 보면 매우 가혹한 상관이다. 일을 시킬 때는 인정사정이 없다. 부하가 힘들어해도 힘드냐는 말 한마디 없이 작업을 계속하게 한다. 자기가 일할 때 물불 가리지 않는 방식을 남에게도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을 때 생각지도 않은 면에서 부하를 생각하고 걱정하며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것은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평상시는 무난한 아버지이다가 무슨 일이 있을 때 그는 매우 무섭고 사정이 없는 엄부로 변한다. 곁에서 보기에 어떻게 저렇게 까지 할까 할 정도로 심한 말을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을 깊은 차원에서 배려하고 생각하는 다정함을 보인다. 주말이 되면 으레 아이들을 찾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편이다. 그는 자지가 겪어온 세상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앞날을 생각하고 걱정해준다. 혹독한 세파를 젖히며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예방적 사려요 배려라고 하겠다.
태생이 과학자
젊어서 그는 대담하달 정도로 무심한 남편이었다. 모든 세심함, 정밀함, 충실함은 일에 몽땅 쏟아 붓고 마누라는 그저 저기 있구나 하는 정도로 모고 있는 듯 했다. 아기를 낳아도 한번 안아보는 일이 없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과외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떤 상급학교에 진학하는지 도무지 아는 척 하지를 않았다. 아이들과의 거리가 좁혀진 것은 그들이 성장해서 인생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로 보인다.
나는 아이들에 관한 문제가 생기면 냉정할 수가 없다. 걱정이 앞서고 감정이 앞서 이성적인 판단도 충고도 할 수 없어 눈앞부터 캄캄해진다. 그러나 남편은 이럴 때 매우 침착하다. 아이들 말을 꼼꼼히 듣고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충고를 해준다. 그럴 때면 역시 부친이 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는 태생이 과학자인지라 만사에 꼼꼼하고 정확하고 무엇이건 무심히 지나치는 일이 없다. 때론 꼬치꼬치 캐물어 귀찮을 때도 있다. 거기에 비해 나는 데면데면하고 웬만한 것은 지나쳐 버리고 사고도 매우 엉성한 쪽이다. 각자의 방은 그런 성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방은 질서정연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고, 내 방은 책장의 책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가로세로 꽃혀 있다.
고학과 문학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사는 우리는 각기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보통은 의식하지 않고 있다가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내가 화초를 손질하다가 그에게 묻는다.
“플랜트(화초)에 수돗물을 주면 안 좋아요.”
“안 좋지. 녹이 스니까.”
‘아니 화초에 무슨 녹이 슬어’ 하다 보니 남편이 말하는 플랜트는 공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거의 강박적인 독서가이다. 지금도 미국, 영국, 일본의 학술정기간행물이 다달이 무더기로 들어온다. 우리 집에는 명색이 교수라는 나보다 그의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 집의 아래 위층을 전부 메워버린 것으로도 부족하여 결국 여주의 농장에 서고를 지어 트럭으로 실어 날라야 했다.
전인터내쇼널을 시작한 지도 근 30년이 되어가는 요즘, 이젠 별 할 일이 없건만 그는 날마다 회사에 나가 앉아 종일 책을 읽고 있다. 그의 관심은 세계의 움직임이다. 각국의, 정치·외교 관계, 경제상황, 환경문제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읽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좋다고 뛰어다니던 옛날과는 달리 요즈음 그의 세계는 집과 사무실로 축소되었다. 대하는 사람의 수도 대폭 줄어들었고, 하는 일도 말할 것 없이 적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예전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그의, 정신 자세를 굳이 바꾸라고 할 생각은 없다. 아니 그대로 유지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그것이 그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60년을 살아오면서 섭섭한 일, 속상한 일, 화나던 일이 없었을 리 없건만 그 모든 일이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니 신기하다. 시간의 치유력이 그만큼 강력한 탓도 있겠지만 결혼생활의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우리는 너와 내가 녹아서 하나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60년의 세월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의 경계선을 지워버린 것이다. 결혼이란 이런 것인가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