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이제 90세이다. 이렇게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는 한편 그 세월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솔직한 소감이다. 지금도 40대 초반에 한국에 정유공장을 짓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느껴지고 이런 저런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제 생각해보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90년 동안 나를 지배하고 나의 삶과 행동을 지배했던 몇 가지 원칙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물론 처음부터 확고하게 서 있었던 것은 아니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 쓰고 시행착오를 구답하면서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굳어진 행동지침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 때 화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어머니의 희망에 위배되는 결심이었다. 어머니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최고 엘리트의 길로 생각하는 이른바 ‘고문(高文) 파스’, 즉 고등문관(高等文官) 시험에 합격하고 관계에 나가기를 바라셨다. 그 바람은 무척 강한 것이었으나 나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일본 지배 하에서 관계에 나간다는 것은 친일의 길을 의미했던 것이다.
나의 과학에 대한 천성적인 관심은 그러한 사회적인 야심이나 출세의 욕심을 훨씬 뛰어넘게 강한 것이었고, 어머니와 심각한 대립도 감수하게 할 만큼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운명적인 것이었다. 어머니는 성격이 매우 강한 분이었다. 그래서 회유, 강압, 유도, 기만 등 온갖 방법으로 당신의 소원대로 나를 법과로 진학시키려 애를 썼으나 나는 굽히지 않았다. 굽히지 않았다기보다 적성의 방향이 너무 달라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게 사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당시는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치는 청년들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이 처한 국제적 위치나 일본의 국력으로 볼 때 그러한 정치운동은 희생이 큰데 비해 얻는 바가 너무 적게 생각되었다. 항일운동과 조선독립을 위해 일한 사람들은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해 모국 땅은 밟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과학의 분야라면 일본의 지배나 간섭을 받지 않고도 연구하고 발전해나갈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신의 만족이나 발전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뒤떨어진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보다 실질적인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허황된 생각이기도 했으나 이 염원은 그때 이래로 나의 인생을 지배하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어려운 편이었다. 부모님은 모두 당시로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으나, 국가의 불행은 그들로 하여금 평탄치 못한 길을 가게 하였다.
나는 1922년 4월 11일(음력 3월 15일) 서울 정동 25번지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피어선 빌딩에서 정동골목으로 들어서 이화여고 쪽으로 가다가 오른편으로 들어가는 골목 안에 있던 집이었다.
부친 전종린(全鍾麟)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개성의 명문인 호수돈(好壽敦)여고에서 교감까지 지내셨는데, 후에 이기붕(李起鵬) 씨의 부인이 된 박마리아 여사를 비롯한 여러 인재들이 당시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부친은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교원면허를 취소당하고 해고당했으며, 그 후로는 모친(김영숙. 金英淑)이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모친은 일본인들이 서울에 세운 제일고녀를 졸업하셨다. 사범학교를 나오지 못하여 정식 교원 자격증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교원으로 일하시며 생활을 꾸려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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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년 부모님을 모시고 / 앞줄 왼쪽부터 어머니, 아버지. 됫줄 왼쪽부터 여동생 옥제(제1고녀), 막내동생 학제(제1고보), 동생 명제(경도 제3고등학교),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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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5살 되던 해에 우리는 어머니의 직장을 따라 경상남도 곤양(昆陽)으로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곤양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7살이 되었을 때, 나는 아직 입학할 나이가 되지 않았으나, 어머니를 따라 학교에 가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직장을 잃은 부친은 생활방책으로 광산경영도 시도해 보고, 일본에 있던 영어학원인 정칙학원(正則學院)을 한국에 개설하기도 했으니 일본인들은 역시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부친이 운영하던 학원을 폐쇄하였다. 우리는 어머니의 얼마 안 되는 수입에 의존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통(지금의 초등학교) 학교 3학년 1학기 되던 해에 모친은 곤양보통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곳에 직장을 구하기 위해 왜관, 천안 등지의 친척집을 전전하며 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3학년 1학기에 공부를 중단했던 나는 1년을 건너뛰고 수송보통학교 4학년 1학기에 입학했다. 당시 우리집은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입구) 1정목 100번지였다. 우리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나는 배가 고픈 적이 많았다.
보통학교 때부터 나는 산수(算數) 성적이 좋은 편이었고, 다른 교과목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도화(圖畵), 음악, 체육 성적은 항상 형편없었다. 나는 예술이나 체육에는 영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한번은 도화 선생님인 조석봉 선생님께서 사과를 그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리라고 가지고 온 사과가 얼마나 먹음직스러웠는지 나는 보이지 않는 뒤쪽 반쪽을 배어먹고 앞에 보이는 반쪽만 그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신 도화 선생님께서는 나의 불량한 태도를 감안하여 미술 점수로 40점을 주신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진학할 때가 되었다. 우리 집의 가난한 사정을 아시는 담임 선생님께서는 미스코시[三越] 백화점 현관에 서서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를 외치는 점원 취직자리를 구해놓고 그리 가보라고 하셨다. 가난했지만 자식들에 대한 자부심만은 대단하셨던 우리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선생님은 원서를 안 써주려 했지만, 어머니는 기어이 원서를 받아내고 마셨고, 나는 거뜬히 제1고등보통학교(第一高等普通學校. 후일 경기중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문과에 진학하여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어머니의 소망과는 달리 나는 과학에만 관심이 쏠렸다. 중학교 시절에는 사진반에서 활동하면서 사진을 찍고 현상하는 일로 나의 호기심을 어느 정도 만족시킬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