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지원 (20화)
  제4장 해병대장교 임관

대학을 졸업하던 해 가을에 해병대사관후보생 모집공고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 진학해서 1학년에 재학 중인 이길흥 친구와 해병대 장교에 지원할 것을 의논했더니, 자기는 수영에 자신이 없고, 또한 보건대학원을 졸업하게 되면 의정장교 중위로 임관할 수 있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나만 혼자 원서를 내기로 했다.

지원서류 중 영관급 장교의 신원 보증인이 필요하였는데, 친척 중에 영관급 장교가 없는지라 친구 이길흥의 용산고등학교 동창 공효상이 해병으로 해병대사령부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어서 이 친구의 도움으로 신원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

공효상 해병은 서울대 농학과 재학 중 해병대에 지원 입대한 사람이었다. 나를 신원보증해 준 사람은 해병대 사령부 비서실에 근무하는 해병소령 고우상이었는데, 내가 임관하고 5년을 해병장교로 복무하면서 한 번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그 분은 해병학교 7기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무던히도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당시 경기도 병무청은 인천에 있어서 인천까지 가서 원서를 접수하게 되었는데, 마침 같이 접수한 사람이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4학년이라고 하는 고인철이었다. 고향은 강화도라고 하였는데, 동기생 중 최초로 만나게 된 친구였다. 자기의 신원보증은 해병대 대위가 해주었는데, 해병대 대위는 육군의 대령과 맞먹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고인철 동기생은 제대 후 괌에서 제법 큰 사업을 하고 괌교민회 회장도 지냈다.

신체검사는 해군병원에서 하게 되었는데, 해군병원은 답십리에 있어 가까워서 좋았고, 심체검사는 다행히 합격이었다. 그 다음 필기시험은 수도여고에서 치르었는데 결과는 모두 합격이었다.

신원조회만 최종으로 남아 있었다. 겨울방학 중에 해병대 상사가 미금면사무소를 거쳐 우리 마을의 가게집에까지 와서 신원조회를 하고 갔다고 했고, 2월 중순 경 최종합격통지서와 함께 진해해병교육사령부 해병학교 입교명령서가 집으로 통보되어왔다.

내가 해병대 장교를 지원한 동기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6.25동란 시 해병대가 인천상륙과 서울탈환에 이어 북한강지구 전투를 벌여 남양주에서 공산군을 밀어냈을 뿐만 아니라, 천마산에 도피해서 은신하시던 우리 아버지를 해병대가 살려낸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해병대만이 우리나라를 통일할 수 있는 용감한 군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해병대 장교가 존귀한 존재일뿐더러 복무기간도 해군이나 공군장교보다 적은 것이 유리한 점이었다. 당시 해군이나 공군 장교 복무기간은 4년 4개월이었고, 해병대 장교 복무기간은 3년 9개월로 제일 짧았다.

 
▲ 남양주 각골고개(해발 60m, 일패동 명우마을에서 지금동으로 오르는 고개)에 있는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

우리 고장 남양주는 6.25때 해병대의 격전장이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각골고개(해발 60m, 일패동 명우마을에서 지금동으로 오르는 고개)를 오르다보면, 왼쪽으로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가 서 있다. 나는 이곳을 오갈 때면 차에서 내려서 전첩비를 둘러보곤 한다. 남양주 예비역 해병들에게는 여기가 해병대의 성지(聖地)인 곳이다. 북한강 지구의 해병대 전투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6.25동란으로 우리나라의 존립이 위태롭던 시기에 9.15 인천상륙에 이어 9.28서울탈환에 성공한 유엔군은 서울 동북방 방어의 필요성을 느껴, 최일선 즉 의정부 방면에 미 해병 1연대를, 우일선 즉 광주지역에 미육군 보병 7사단을 진출시켰고, 우리 해병대는 남양주지역에서 북쪽에는 5대대, 중앙에는 2대대, 남쪽 즉 한강변에는 1대대가 적 소탕작전을 개시하여, 1950년 10월 1일부터 7일에 북한강까지 진출, 남양주 일대의 적을 완전 소탕하여 공산인민군을 완전히 물리치게 되었다.

신현준 해병대령이 지휘하는 해병대의 2대대(김종기 소령)와 5대대(김대식 중령)는 10월 1일 작전명령을 받아 본부를 망우리에 설치하고, 10월 2일 10시 인창리와 교문리를 공격개시선(LOD)으로 하여 진군하던 중 도농 남방고지로부터 적 1개 연대를 정면 공격한 끝에 고지를 점령하고, 2대대는 가운리와 마석우리를 점령하였다.

전투 중 2대대 8중대(서연남 중위)는 고전을 하였으나 좌일선 5대대의 박격포 지원으로 고지 점령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 작전에서 적군은 사살 200여명, 포로 50여명이었고, 아군피해 16명 전사, 63명이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패주한 적 잔병은 165고지(진관), 113고지(지금)에 집결하여 재공격을 시도하였으나 5대대의 집중포격으로 섬멸당했다.
 
5대대는 10월 3일 12시 30분 금곡을 점령하였고, 금곡 북방 700m 돌팍고개의 적 진지를 파괴하고 지뢰를 제거한 후 10월 4일 12시에는 마석을 점령하고 17시에는 북한강 대성리까지 진출하였다.

1대대는 공격개시선(LOD)를 떠나 작전을 개시하여 10월 2일 15시 덕소를 점령하고, 17시에는 족자섬 일대와 북한강 지역 송촌리까지 진출하였으며 큰 접전 없이 포로 27명을 생포하여 후송하였다. 10월 5일 작전을 완수하고 인창리 사령부에 집결하여 6일 해병대 사령부, 5대대, 1대대. 2대대 순으로 트럭 90대에 분승하여 출발해서 인천으로 향하였다. 이로써 북한강지구 전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졸업과 여중 선생님 (19화)
  해병학교 가입교 (21화)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