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ㆍ8김해공군비행학교 기습사건 (25화)
  제4장 해병대장교 임관

1966년 8월 8일 토요일은 유난히 무더운 날이었다. 군사혁명 이래 해미다 가뭄이 들고 불볕더위는 몇 년째 계속되었던 때였다. 어느덧 기초반 교육도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오전과업을 마치고 대청소를 하였다. 건물 청소뿐만 아니라 내무실 정리정돈에 병기 손질 등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점심이 끝나고 외출 외박이 시작되는데, 이날 은 왠지 재점검에 재점검이 거듭되다가 오후 3시가 지나고 4시다 다 되어서야 점검이 끝나고 외출외박 명령이 내려졌다. 즐거운 주말 외출외박이 짜증스럽게 시작되었다.

외출 외박을 못 나간 장교들은 세탁을 하거나 쉬면서 영내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귀대 시간은 항상 일요일 오후 8시였다. 저녁식사 후 순검이 끝나면 특별훈련이 시작되는 게 통상의 일이었다. 외출 외박을 다녀오면 긴장이 헤이해질 뿐만 아니라 과식을 했기 때문에 다음 일주일 간의 과업을 위해 재 긴장을 시켜야 했고, 또한 과식한 것을 소화시켜주어야 했다.

순검이 끝나고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부산으로 외박 나갔던 동기생 몇 명이 얻어맞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해병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사연인즉 이랬다. 부산으로 외박 나갔던 동기생들이 부산에서 진해로 오는 시외버스 막차를 타게 되었는데, 막차는 초만원이었다. 동기생 해병소위 8명은 간신히 만원버스에 올라타게 되었지만, 뒤늦게 온 공군장교 3명이 만원버스에 타려는 것을 못 타게 한 것이 시비가 되었다. 이 공군소위 3명이 김해비행학교에 가서 일행을 몰고 트럭을 타고 시외버스를 뒤따라와서는 차 안에 탄 해병소위들에게 몰매를 주어 얻어맞고 귀대하게 된 것이었다.

순검이 끝나자 동기생들은 구대장도 모르게 보복작전을 결의하고, 이튿날 새벽 해병학교 입초 근무자와 옥외 동초 근무자 16명만을 남기고, 126명이 교육기지사령부 철조망을 5명이 1개조가 되어 조별로 철조망 통과를 하였다. 교육기지 야간 보초근무자는 이를 보고서도 훈련 중인 줄로만 착각하고 보고하지도 않았다. 해병학교에서는 야간훈련이 흔히 있던 일이기 때문에 예사로 여겼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야근 근무자는 영창 신세를 졌다고 한다.

경화역에서 새벽에 출발하는 기차를 무임승차하여 창원역에서 내려 버스 2대와 트럭 1대를 납치하여 김해공군비행학교로 쳐들어갔다. 위병소에 도착해서 공군헌병 근무자를 몇 대 쥐어박고, 그를 앞세워 비행장교 숙소로 안내받아 정렬하여 구보로 도착하였는데, 마침 기상시간이라 자는 놈에, 화장실 가는 놈에 평화롭던 내무실이 해병소위들의 기습작전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는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야전침대 마구리의 막대기를 뽑아서 닥치는 대로 패주었다. 머리가 터져 피가 나는 놈에,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놈, 캐비닛 안에 숨어서 안 나오겠다고 버티는 놈도 있었다.

완전 박살을 내고는 기습작전에 성공한 우리는 연병장에 정렬하여 해병대 군가를 불러대면서, 비행학교장은 나와서 어제 일은 사과하라고 외쳐댔다. 이때 당직사관 이양호 공군 대위와 당직 총사령 최 중령은 우리에게 와서 돌아가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으나, 우리는 비행학교장의 면담과 사죄만을 요구하였다.

시간이 지나니 비행학교 방송에서 모든 병사는 싸울 준비를 하고 연병장으로 모이라는 스피커 소리가 계속 요란하게 울려퍼짐과 동시에 공군 장ㆍ사병들은 런닝셔츠 바람에 몽둥이를 들고 돌팔매질을 하면서 우리에게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천여 명이 되는 많은 숫자였다. 돌멩이가 정렬해 있는 우리 머리 위로 날아와 떨어져 하는 수없이 훈련비행기 옆으로 옮겼지만, 그곳으로도 돌멩이가 날아왔다. 비행기에는 돌을 안 던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 김해공군비행학교 기습사건은 언론에도 크게 실릴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 (동아일보 1966. 8.9.)

우리는 비행기에서도 후퇴를 하여 높이 쳐진 외곽 철조망을 밟고 넘어 비행학교를 빠져나와 논밭길을 달리다보니 개울이 나타나서 좁은 여울을 찾아 건넜다. 평강천이라 하는데, 흐르는 개울물이 아니고 고인 물이었다. 물에는 수초가 무성했고 물속에서 사는 덩굴식물의 줄기가 팔과 다리에 걸려서 풀을 헤치며 개울을 건넜다. 수영에는 자신이 있어서 먼저 건너갈 수 있었고, 내 뒤를 따라 동기생들이 건너오기 시작했다.
 
나는 대나무 장대를 구해다가 동기생 여러 명을 물에서 건네주었다. 경황이 없던 사이에 이곳에서 경희대 상과를 나온 이의일 소위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애석하게 운명하게 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도하를 마치고 나서 집결지에 모이고 보니 해병학교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트럭이 여러대 와서 우리를 실어 나를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해병학교 중대장 송재신 대위(해사 14기)와 구대장 네 분이 모두 와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우리를 보살폈다.

강기천 해병대 사령관은 노발대발 하시고 박정희 대통령 역시 분노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신문지상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주요 일간지의 1면 전면을 우리들의 기사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국방부에서는 해병 소위 전부를 처벌하겠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일로 주모자는 처벌되었다가 모두 구제되어 동기생은 전원 무사히 해병학교를 수료하게 되었다. 정부 측에서는 모두 처벌하려고 했지만 해병대 수뇌부에서는 지난해 10월 월남참전으로 초급장교가 무척 소중한 때인지라, 어차피 참전시켜 사지에 보낼 장교들인데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고 한다.

이 결과 해병학교 이영호 해병대령과 공군비행학교장이 옷을 벗고 전역하게 되었다. 해병학교장에게는 대단히 송구할 따름이다. 이양호 공군 대위는 당직 사관으로 3개월 정직의 징계를 받았는데, 이 분은 후에 공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하게 된다.

당직 총사령 최성만 공군 중령은 포항 출신으로 곧 대령 진급 예정자이고 유망한 공군 장성감이라고 했지만 아깝게도 옷을 벗어야 했다. 더욱 아쉬운 것은 제대 후 대한항공 부기장으로 근무 중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다가 공중 납북되어 지금도 북한에 억류 중이다. 우리 때문에 생긴 일로 미안하기 그지없다. 그 비행기의 스튜어디스 두 명도 북한에 억류 중이라고 한다. 그 분들에게 모두 송구할 뿐이다.

이 사건 이후 우리는 사뭇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기초반 교육을 받아야했다. 교관님들께서는 상륙작전 교육을 아직 안 배우고 실전을 먼저 했다고 농담을 먼저 해주시며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했다. 상륙기습작전은 Hit and Run이 중요한데, Hit는 성공했지만 Run 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너무 오랫동안 외쳐댔던 것이 흠이었다.

 
  기초반 교육_2 (24화)
  해병 제1상륙사단 소대장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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