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제1상륙사단 소대장 (26화)
  제4장 해병대장교 임관

8ㆍ8 김해비행학교 기습사건 이후로 근신령이 내려져서 주말의 외출 외박이 전면 금지되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해병축구를 하거나 각자 휴식을 취했고, 일요일에는 단체로 교육기지 사령부 안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을 했는데, 이때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어느 일요일엔가 교회에 가서 정렬해 있는데, 해병버스에서 내려 교회로 올라가는 군인 가족 중에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과 그 남편인 선배 장교가 함께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해병학교 입교하기 전에 그 동창생이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진해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초등학교에서 6년간 같은 반이었는데, 인물도 곱고 마음씨도 착하고 공부도 잘 하였다. 그녀의 집은 면소재지 금곡에서 상점을 하는 부잣집으로 저금도 제일 많이 하는 학생이었다. 내가 그녀 옆으로 다가가서 거수경례를 하였더니 그녀도 무척 놀라며 반가워했다. 그녀의 남편은 해병학교 32기 선배 나도연 중위였는데, 키도 크고 늘씬한 멋쟁이였다. 동국대 상과를 졸업하였고, 보급 장교로 해병학교에 근무 중이며 우리에게는 보급교관이었다. 두 분은 주말에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했지만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우리 동기생은 142명이 임관하여 1명을 잃고 9얼 10일 141명이 기초반 교육을 수료하게 되었다. 수료하기 전에 우리는 병과(兵科, 근무의 종류에 따라 나눈 종별로 보병, 포병, 공병, 통신, 보급, 수송, 전차, LVT 등이 있다)를 지망하게 되는데, 나는 1, 2, 3 지망 모두 보병을 지원하였다. 보병은 군대의 기본 병과이고 군인의 꽃이었다.

해병대 의장대 시범과 군악대의 연주가 있는 가운데 해병학교 제16기 기초반 수료식은 성대히 치러졌다. 선배 기수의 경우 기초반 과정을 수료하면 통상 일주일 간의 보상휴가를 받고 쉬었다가 임지로 가게 되었지만, 우리는 수료식이 끝나자마자 기차에 실려서 곧바로 포항으로 이동하였다. 사실 나는 김포해병여단으로 가고 싶었다. 김포는 고향 양주 땅과 가까워 외출 외박이 가능했고, 친구들과도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이제부터 해병대 장교 복무는 시작되었고, 그 다음해부터는 동기생 전원이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더욱이 우리 35기는 보병이 대다수여서 67, 68년도에 월남전에서 1, 2, 3소대장, 화기소대장과 포병 관측장교 등 중대에서 5명이 동기생인 때도 있었다.

우리 동기생은 특히 월남전에서 희생자가 선배, 후배 기수에 비해서 아주 적었고 중위, 대위 진급도 전원 빠르게 되었다. 특히 이영세 장군, 전도봉 장군 등 2명의 장군을 배출하였고, 해병대 제22대 사령관을 배출하여 해병학교 여러 기수 중에서 명예로운 기수가 되었다.     

1966년 9월 10일. 포항 제1 상륙사단에 배치 받은 동기생들은 해병학교 기초반 교육이 끝나는 날 수료식을 마치고 곧바로 대기 중이던 특별열차를 타고 창원과 삼랑진을 거쳐 부산을 지나 포항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끌려서 포항으로 유배되는 느낌이었다. 열차는 운행 중 중간역에서 한 번도 정차하지 않고 종착역인 포항역에 곧바로 도착하였다. 대기 중이던 해병대 트럭에 분승해서 포항시내를 거쳐 사단본부로 향해 달렸다. 포항은 한 뼘 정도 되는 소도시였고, 건물은 단층들이고 길가에는 초가집도 드문드문 있었다. 시가지를 벗어나 갈대밭을 지나 황토길에 흙먼지를 풍기며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렸다. 날씨마저 우중충해서 포항의 첫 인상은 쓸쓸해보였다.
 
▲ 60년대 말의 포항역 전경과 역 광장 [출처 ; 포항시청]

해병사단에 도착하여 부대배치를 받고 보니, 나는 3연대 9중대 2소대장이었다. 3연대는 모두 그때 영덕, 울진, 안동 등지에서 게릴라작전 중이었기 때문에 3연대에 배치 받은 장교들은 관품들을 각자 중대 건물의 소장실에다 정리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이틀이 지난 12일에 작전지역에 있는 소속부대로 트럭을 타고 찾아갔다. 생전 처음 보는 동해안의 새파란 바닷물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와서 암벽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만들어 산산이 부서지고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영덕 강구(江口)에 이르니 오십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며, 다리 건너 낮은 산 언덕의 집들이며, 바닷가 항구에 놓인 배들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길가에 줄을 지어 매달려 말리는 오징어들도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경기도 산골에서 자란 나는 바다풍경이 너무 신기했다. 사실 나는 바다를 너무 동경한 나머지 바다가 보고 싶어 해병대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

2대대 본부는 영덕 읍내 옆에 있는 오심천변에 대대 CP를 잡고 있었다. 중대장을 찾아가서 인사했다. 중대장은 해병학교 32기 신기택 선배 장교로, 계급은 대위가 아니라 해병중위였고 부산 출신으로 서울법대를 나오신 분이었다. 중대장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하시면서, 최 소위는 고생하지 말고 여기 남아서 대대 CP 경계임무를 하라고 명령하신다. 우리 2소대가 대대본부 외곽경계를 맡고 있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초소를 운영하여 주야로 경계임무를 하는 것이었다. 소대장은 초소 근무자가 졸지 않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가 하고 순찰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영덕은 인심이 참으로 좋은 곳이어서, 주민들은 훈련 중인 군인들이 배고프겠다고 햇고구마를 삶아다 주기도 하고, 한참 익어가는 사과를 따다가 병사들에게 주곤했다. 소대장이 순찰을 돌다보면 주민들은 소대장한테 병사들이 야단맞을까봐 얼른 도망가기도 했다.

며칠 지나서 장마를 만나게 되었는데, 장마 중에 환자가 발생하였다. 야전 의료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열이 내려가지 않고 계속 신음을 내서 궁리 끝에 가까운 읍내에서 제일 큰 집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쾌히 승낙하면서 환자를 따뜻한 온돌방에서 쉬도록 해주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틈이 생기면 환자를 문병하러 갔다. 집주인은 인정이 많아서 대장님이 오셨다고 하면서 소대장에게 찐고구마며 감자며 찐쌀이며 손님 대접이 극진하였다. 찐쌀 먹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찐쌀은 햇벼 이삭을 잘라다 볶은 것인지, 찐 것인지 한 것인데, 왕겨를 볏겨 낸 현미 같은 것이었다. 처음 씹어보니 딱딱하기만 했지 도무지 무슨 맛인지 몰랐다.

대대본부에는 대대통신관인 동기생 김재명 소위가 있었다. 보름 정도 지나니까 울진에서 훈련 중이던 전준시 소위가 귀대하였다. 전 소위는 강원도 평창 진부가 고향으로, 고려대 사학과 출신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 소위에게는 고향집에 갓 결혼하여 두고 온 예쁜 아내가 있었다. 같은 고향의 처녀로 미인이었는데, 일찍 연애를 해서 결혼하고서 입대한 것이다.

전 소위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밤이 되니까, 나를 굳이 데리고 영덕읍내에서 제일 크다는 술집으로 갔다. 그 집은 영덕에서는 알아주는 집이었고, 특히 설 마담의 미모는 대단했다. 전 소위와 나는 오래간만에 막걸리를 폭음하였고, 나는 못 마시는 술에 그 집에서 그냥 떨어져 잠들었다. 술집에서 만취하여 잠들기는 평생 처음이었다.

작전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철수 명령이 내려 부대는 이동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신세졌던 집에 작별 인사를 하고 가는 게 도리였기에 출발 직전 잠시 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그 집에서 찐쌀을 한되박 주면서 가면서 먹으란다. 나는 고맙기는커녕, 군대생활이 너무 배고프다고 하니까 소대장까지 굶는 줄 아는 듯해서 언짢은 생각이 들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찐쌀은 아주 소중한 것이란다. 풍습은, 작은 나라이지만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 3연대는 트럭을 타고 동해안의 바닷가를 따라 포항사단으로 귀대하였는데,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 첫 작전이었다. 귀대하고 사흘이 지나니 추석이 다가왔다. 추석날 포항시내에 외출을 했더니, 모든 가게와 식당, 다방들의 문이 잠기고 쉬는 바람에 부대 안에 있었으면 점심은 먹을 수 있었을 것을 시내에 나왔다가 오히려 굶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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