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명령 (28화)
  제4장 해병대장교 임관

2월 26일은 O실이의 대학졸업식 날이었다. 마침 행정선이 낮 12시에 화순항에 상륙한다고 하여 나는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상륙허가를 받아 상륙정으로 화순에 나갔다. 화순은 남제주군 안덕면 소재지로 초등학교도 있고 우체국도 있었다. 상점에서 밀감을 사서 한 상자에 여섯 개씩 넣어 세 상자를 만들어 우체국에 가서 소포로 발송하였다.

한 군데는 내가 1년간 근무하였던 상명여자고등학교 배상명 교장, 한 상자는 고향집에, 한 상자는 대학을 졸업하는 O실이에게 축전과 함께 보냈다. 1960년대에 서울에서 밀감 구경하기는, 당시 재벌이 아니고서는 구경조차 힘들 때였다.

Phid Raid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우리 2대대는 제주항에 입항하여 완전무장하고 제주시가지를 행진하였다. 시민들이 몰려나와서 꽃다발을 목에다 걸어주고 요란한 박수갈채를 보내 우리는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제주는 해병의 도시였다. 6.25당시 제주도 청년들이 대거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간단한 훈련을 마치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시작한 이래, 제주도 청년은 군대는 당연히 해병대로 가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시가행진이 끝나자 제주 예비역 해병들이 위문품을 잔뜩 가지고 LST813함정으로 방문해주기도 했다.

다시 LST813함정을 승선해서 양포항으로 돌아와서는 하선망 야간훈련을 하였다. 마침 미 해군 군함이 입항하여 함상에서 그물을 타고 완전무장한 채 상륙정으로 바꿔 타는 훈련이었다. 큰 배는 파도에 끄덕도 않지만 작은 배들은 파도에 약해서 파도를 따라 우아래로 오르내린다. 완전무장을 하고 캄캄한 야간에 파도치는 가운데 그물을 타고 내려 상륙정에 옮겨 타기란 만만치 않은 훈련이었다. 실수하면 떨어져 몸이나 총이 바닷물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선망 훈련이 밤 10시4가 지나서야 끝나고 소대 천막에 돌아와서 잠시 쉬려고 할 즈음, 각 소대장은 대대장실에 집합하라는 전갈이 왔다. 대대장 CP천막에 도착하니 동기생 여려 명이 이미 와 있었다. 난로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추운 몸을 우선 녹였다. 대대장은 김원균 중령이었는데, 우리는 거북이라고 별명을 불렀다.

동기생이 전원 모이고 나서 대대장에게 신고하였더니, 대대장 말씀이 “귀관들 그동안 훈련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오늘 날짜로 특수교육대 입교 명령이 났으니, 오늘밤 12시 안으로 특수교육대에 가서 신고하기 바란다.” 하는 것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다. 월남 파병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닥칠 줄은 정말 몰랐다. 해병 상륙사단에 부임하여 소대장으로 근무한 지 8개월 째였다.

대대장 천막 옆에는 이미 트럭이 엔진 시동을 걸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대장에게 출발신고를 하고 사단 내에 있는 특수교육대로 향했다. 8개월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뛰었고, 포항사단의 4개 정문인 동문, 서문, 북문, 남문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야외에서 훈련만을 연속으로 하였으니, 부대 안의 막사에서 잠을 잔 날보다는 야외에서 숙영한 날이 더 많았었다. 운명이야 어찌하랴! 
 
▲ 1967년 2월 제주 OO해안지역에서 Phid Raid 훈련을 마치고 제주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1967년 3월 초순 토요일 밤 12시에 동기생 10여명을 태운 트럭이 특수교육대에 도착하였으나 부대엔 당직근무자만 있어서 신고는 못하고 6중대 소대장실에 가서 잠을 잤다. 다음은 일요일이라 푹 쉬고 월요일 아침 8시에 특수교육대에 가서 신고를 했다.

특수교육대는 파월장병을 위해서 월남전의 전술과 작전, 그리고 월남의 기후와 풍습과 역사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이미 우리 중대의 1소대장 이수현 소위는 파월하여 청룡부대 11중대 소대장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월남전 야외교장은 오천을 지나 양포로 가다가 왼편에 설치되어 있었다. 월남전과 같은 지형의 상황을 만들고, 월남전에 대비시키는 훈련 장소였다. 양포 벽암지 훈련장에서 암벽오르기, 외줄타기, 하강훈련 등을 하고 수성 박격포사격장에서 포사격 훈련도 하였다.

월남 교육장에는 월남으로 떠나기 전 자식이나 애인을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면회객들이 끊이질 않았다. 3주간의 교육도 이럭저럭 금세 지나갔다. 교육이 끝나고 대기상태가 되었는데, 비행기로 공수하느냐, 배편으로 출발하느냐가 결정이 안 된 모양이더니 3박4일 간의 휴가가 주어져서 개인용품은 모두 배낭에 넣고 귀향하였다. 개인용품은 동정복, 하정복, 외투, 정모, 작업복, 동내복, 내의, 신발 종류 등 제법 많았다. 짧은 휴가 일정동안 친구들 만나기 바빴다.

동복은 겨울이 다 지나갔으니까 필요 없고, 하복은 아직 이르니 두고 간다고 말하고는 작업복 한 벌만 입은 채로 집을 떠나 포향으로 내려와 귀대하였다.
    
파월명령을 받은 장교는 모두 17명이었는데, 그 중 13명은 모두 동기생으로 소위들이었고, 네 분은 선배장교들로 보병장교, 경리장교, 항공장교, 통신장교 1명씩으로 모두 특과들이었지만, 우리 동기생 13명은 보병장교 8명, 포병장교 4명, 보급장교 1명이었다.

우리 동기생 13명은 월남전에서 전사 또는 부상당하여 공석 중인 장교의 보충요원이었다. 4월 12일 밤 사단장 공관에서 송별연이 베풀어졌는데, 정광호 사단장을 비롯하여 사단참모들이 격려와 함께 군악대 연주로 흥을 돋우어주었으나 우리 파월 장교들은 내내 긴장했다.

밤늦게 송별연은 끝나고 마지막 밤을 특수교육대 내무실에서 잠을 잤다. 13일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해병버스를 타고 포항역에 8시에 도착하였다. 군악대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리 17명 파월장교는 대기 중이던 기동차에 몸을 싣고 경주를 거쳐 부산 제3부두로 곧바로 들어갔다.

파월 해병장교들은 백마부대와 동승하여 월남으로 떠나게 되었고 환송 나온 인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어느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은 단체로 나와서 합창을 해주었다. 우리는 이들 여학생들에게 지난밤에 받은 봉급 석달치 뭉치를 환송의 답례로 함상에서 배 아래쪽으로 던져주었으나, 던진 돈들은 낙엽처럼 날아가 환송객들한테로 가지 않고 바닷물로 떨어졌다. 우리는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 따위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어린 동생 같은 학생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보내준 것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뱃고동이 뚜우우- 하고 몇 차례 둔탁하게 울리고, 큰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오륙도를 지나고 부산은 서서히 멀어져갔다. 나의 조국을 이것으로 마지막 보는 것 같았다. 이 날은 잔인한 4월인데다, 액운의 13일이었고, 더욱이 금요일이어서 불길한 징조로 보였다.

 
  해병 제5여단 창단 (27화)
  월남전장(越南戰場)으로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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