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룡작전 (31화)
  제5장 월남전 참전

1967년 5월 15일이었다. 월남에 참전한 지 채 한 달도 안 되었을 무렵, 여단본부에 한국에서 위문공연이 왔기에 6중대 장병들은 주간경계 근무자를 제외하고는 모드 트럭을 타고 여단본부 연병장으로 가서 고국 연예인들을 보게 되었다.

패티김 내외가 결혼 기념으로 위문공연을 와서 노래를 불러주었고, 문주란은 ‘동숙의 노래’를 여러 차례 앵콜 받아 불러주었다. 이미자는 ‘황포돚대’를 불러 병사들을 울음바다로 만들었고, 김세레나 역시 멋진 노래를 불러 병사들을 위문하였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병사들을 무대에 뛰어올라가 춤을 추기도 했는데, 한번은 가슴에 주렁주렁 매단 수류탄 중 한 발리 무대 마루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혼비백산하기도 하였다.

위문단은 청룡부대에 오기를 꺼렸다. 사이공에서 북쪽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데다가 공연 중에도 대낮에 포탄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군의 백마부대나 맹호부대를 거쳐 해병여단까지 와보면, 육군과는 전혀 딴 모습으로 산적 같은데다가 수류탄을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모습이 너무 고생한다 싶어 부둥켜안고 울어주며 진심으로 위문해주었다.

위문 공연에 갔다가 동기생들과 찍은 사진 한 장을,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권도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로 있는 동기생이 30년이 지나 최근에 보내온 일이 있다. 스물일곱 나이에 찍은 사진이었는데, 월남에 온지 채 한 달도 안 되어서 살갖은 아직도 희고 날씬한 모습이었다. 가운데 서 있는 배효근 중위는 포병 관측장교로 후일 6중대 관측장교로 와서 같이 작전을 했고, 옆에 서 있는 김광길 중위는 5중대 소장으로 나보다 먼저 파월되어 5중대의 킬러(Killer)중대 명성을 창조해낸 용감무쌍한 소대장이었다.
 
▲ 추라이전선으로 온지 채 한달이 안 되어 여단본부의 위문공연에 참석하고 (위 본문 설명으로 대신함)

오월이 가고 유월이 되었다. 대대 방석(방어진지) 앞에는 피난 가서 폐허가 된 집들이 몇 채 있었는데, 집안 마당에는 우물이 있고 마당 가운데에는 보겐빌레아의 심홍색 꽃들이 푸른 하늘을 치솟아 올라가면서 불타는 듯 피어올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작전이나 정찰이 없는 날에는 이 집 우물가에서 목물도 하고 빨래도하였는데, 전쟁이 아니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던 곳이었을 것이다.

6월 3일 노룡작전 명령이 내려왔다. 2대대 단독작전으로, 작전 기간은 2박3일이고, 작전 지역은 106고지 뒤편 늪지대였다. 이곳은 베트콩의 소굴로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다. 월남에서 녹색지역은 대부분 도시로서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는 곳이고, 황색지역은 도시의 교외지역으로 낮에는 월남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만 밤이 되면 베트콩이 준동하는 지역이고, 적색지역은 완전히 베트콩들의 지역으로 월남정부의 행정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106고지 뒤편 늪지대는 적색지역에 해당된다.

작전 첫날은 늪지대 주변을 탐색하였는데, 마을에는 요새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우물이 있기에 철모에 끈을 달아 물을 퍼올려서 손가락에 낀 은반지를 담가보았지만 색이 변색되지는 않는다. 은반지는 월남으로 오기 전에 포항시내 금은방에서 한 돈짜리를 사서 끼고 온 것이다. 은반지는 화학물질에 금세 변색되어 물에 독약이 있는지의 여부를 가려낸다.

철모 바가지에 담긴 물에 장구벌레가 꿈틀거려서 허리에 찬 정수제(淨水濟)병에서 서너 알을 꺼내 물에 넣으니, 꿈틀거리던 장구벌레가 금세 죽어버리고 그 물을 꿀꺽꿀꺽 마시니 속이 시원하다. 잠시 후에 손에 낀 은반지가 검게 변색되었기에 이상해서 추적해보니, 마시다 흘린 물에 정수제가 들어간 게 원인이었다.

음산한 지역이었지만 접적(接敵)은 없어 106고지 산록에서 야간 숙영 준비를 하는데, 그 인근에는 대나무 꼬챙이를 박은 수두룩했다. 중대 숙영지는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해서 원형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나의 개인 호 옆에는 용설란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자생하고 있었다. 가벼운 작전이라고 해서 전투 정찰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다시 노룡작전 2호 명령이 내려와 작전은 이어졌다.  

5월 8일은 한국에서 총선거 하는 날이었지만, 파월부대는 부재자 투표를 출발 전에 이미 하고 나온 터였다. 국내 같았으면 여당에 표를 찍으라고 강요할 터였지만, 전쟁 터이고 보니 그런 간섭이 없어 좋았다. 나는 자유당 정부이든 군사쿠데타 이후에 생긴 정부이든 여당에는 부정적이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는 기피대상 인물들이었다.

노룡2호 작전은 106고지 동편으로 기동해서 61목표와 62목표를 점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탐호이(參會) 마을 가까이에 있는 야산으로 베트콩의 소굴이었다. 61목표는 1소대, 62목표는 2소대의 동시 공격목표였다. 우리 2소대는 1분대를 좌일선에서, 3분대는 우일선에서 동시에 선두공격을 하게 하고, 그 뒤에 소대본부를 위치시키고 2분대는 후위분대로 공격대형을 구성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8부 능선쯤 공격하여 올라갔을 무렵, 굉음이 연거푸 터지면서 화약 냄새와 함께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더니 머리 위로 흙덩이들이 우두둑 떨어진다. 일은 터졌구나 하고 급히 뛰어올라가 보니,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며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땅이 군데군데 깊이 파였다. 팔 다리가 여기저기서 흩어져 있고 신음소리는 이미 멈췄다.

위생병을 급히 불렀다. 산 정상 부분에서는 늘 부비트랩과 함정들을 조심해야 했는데, 항공폭탄과 105mm 박격포 불발탄 여러 개를 인계철선으로 연결해놓은 부비트랩 지대에 들어가 인계철선을 건드린 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이다. 미 해병대에 메드백(환자 수송)을 요청하여 헬리콥터로 시신을 후송하였다. 참담한 전투손실이었다.

오후에는 다음 목표를 돌격하여 5명을 사살하였으나 동굴로부터 날아온 저격을 받아 1분대장 최춘근 하사가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즉사했다. 2분대장에게 명령하여 저격해오는 동굴을 공격하게 하고서, 1분대 선임조장에게는 분대장의 시신을 찾아오도록 명령하였다. 최춘근 하사는 이번이 마지막 작전이었고, 귀국 일자를 일주일 남겨놓은 상태였다.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해야 한다면서, 유자 철자망 뭉치를 대나무 줄기에 꿰어 역기를 만들어 조석으로 운동을 하던, 민첩하고 영리한 분대장이었다.

그날 밤에는 야간 기동을 하는데, 2분대의 선임 조장 전상학 해병이 소대장인 나에게 다가오더니, 2분대를 후위 분대에서 전위부대로 하여 소대의 전위에서 가도록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후위 분대는 자꾸 무엇이 따라오는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불안해졌다고 한다. 나는 야단을 치고 꾸짖어 보냈는데, 그는 이튿날 갑자기 당한 저격으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전사하였다.

전상학 해병은 고아 출신으로 청량리에 있는 고아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가 다니던 학교 부근 동네 인지라 관심있게 보아왔던 터였는데,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음을 예견했던 것 같았다.

노룡 2호작전 중에 남지나해의 바닷가까지 먼 기동을 했고, 작전기간이 여드레나 걸렸는데, 노룡작전(怒龍作戰)은 이름이 그러하듯이 용이 노했는지 우리 소대에게는 인명 피해가 막심했다. 노룡작전을 끝내고 부대에 들어와서 우리는 무장도 풀지 않은 채 전사한 전우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려야 했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소대장 앞으로 편지가 와서 뜯어보니, 노룡작전에서 전사한 박태근 해병의 아버지 되는 분의 편지였다. 화선지에다가 붓글씨로, 자기 막내아들이 월남전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소대장은 내 아들을 대신해서 몸 성히 싸우다가 귀국하길 바란다. 자기 큰 아들도 공군사관학교를 나와서 현재 공군 소령으로 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 분의 편지를 읽고 나는 또 한 번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귀국해서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가니, 나의 전우들은 서 21묘역에 모두 나란히 누워 있었다. 962 고 최춘근 중사, 943 김상남, 944 이용한, 945 박태근, 947 전상학, 948 백성룡, 949 김기추 해병들의 묘비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가져간 소주를 잔에 따라 비석을 적셔주고 넋을 위로해 주었다. 박태근 해병의 묘비에는 그의 부친이 묘비석을 세워주었는데, 막내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였다. 비문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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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마다 유월이 오면 국립묘지를 찾아가 전사한 전우들에게 소주 한잔씩을 부어준다.

전사자의 부모 뵙기가 송구스러웠었다. 김상남 해병의 동생 가족들은 지금도 가끔 찾아오지만. 최춘근 하사의 고향은 전주였는데 해마다 오시던 어머니가 안 오신지 여러 해 되었으니 아마 돌아가셨나 보다. 고향이 진천인 이용한 어머니도 뵈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슬픔을 못견뎌하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이렇게 죽어서 돌아왔다고 하며 눈물을 닦으신다.

내가 너무나 못할 일을 한 것 같아 죄송할 뿐이었다. 요새는 현충일이 되어도 찾아오는 가족들을 만날 수가 없다. 모두가 잊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소대장이었던 나만은 해마다 찾아가 전우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겠다고 굳게 약속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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