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곤 중대장(해사12기)이 임기를 마치고 대대본부로 전출가고 나서 김성진(해사14기) 대위가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김 대위는 여단본부 비서실에 근무하다가 소총중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위문편지를 한 보따리를 갖고 와서 각 소대마다 나누어 주었다.
우리 소대에 온 편지 중에서 나도 한 장을 골라냈다. 볼펜글씨로 아주 깨끗이 쓴 예쁜글씨였고, 더욱이 서울의 명문여자중학교 학생이었다. 한 장만 고르고 나머지는 각 분대에 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학생의 이름은 한소영(韓素英)이고 경기여자중학교 2학년이라고 했는데, 답장을 써 보내고 한 달쯤 지나니 소영이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어느 날 종례 시간에 선생님이 자기를 부르기에 걱정스럽게 나가니, 월남에서 해병대 소대장님한테서 편지가 왔다고 하면서 편지 한통을 주시길래 반갑게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도중에 어떤 친구가 편지를 낚아채어 빼앗겼는데, 종례시간이 끝난 후에 편지를 달라고 졸라댔더니 빵을 사주어야 편지를 주겠다고 해서 빵집에 가서 사달라는 빵을 다 사주고서 편지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너무나 어린 학생들의 장난이 재미있어서 편지를 읽다가 혼자 웃었다.
청룡부대는 서울의 어느 여자대학과 자매학교여서 여대생으로부터 위문편지가 많이 왔다. 생물학과 학생은 고향이 부산이라는 문학소녀였고, 약학과 학생은 청마(靑馬) 유치환 선생을 존경한다면서 시를 보내주는가 하면, 어떤 여학생은 체육시간에 위문편지를 써내어 출석이 되기 때문에 써 보낸다며 대학노트에 글을 보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초등학생들이 글씨를 예쁘게 쓰고 그림을 정성껏 그려 보내는 것이었다. 싱거운 어느 여학생은, 월남여자가 정말 섹시하냐며 물어오는 등 장난기의 편지도 허다했었다.
부모 곁을 떠나봐야 부모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고향을 떠나봐야 고향이 그리운 것을 알게 되며, 조국을 떠나봐야 애국자가 된다는 것을 월남에 와서야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나이 스물여섯에 처음 고향을 떠나보았고, 타국에 와서 전투를 하고 있어 몸은 비록 월남 땅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항상 고향에 있고 고국에 있었다.
작전이나 매복, 주간정찰이 없을 때면 친구들에게 종종 편지를 썼다. 군사우편을 무료이므로 편지지와 봉투와 볼펜만 있으면 되었다. 중대 진지에는 헬리콥터가 매일 마실 물과 보급품, 그리고 고국의 편지를 날라다 준다. 편지를 받은 병사들은 기뻐서 날뛰지만, 못 받은 병사들은 시무룩해서 물러난다.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편지가 없을 경우에는 바나나 잎에다 볼펜으로 편지를 쓰기도 한다. 편지지는 대대본부 PX에나 있어 전방중대에서는 이것도 귀한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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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남전에 참전한 한 병사가 위문편지를 읽고 있다 [출처 ; 청룡(군사적)게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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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레이션 상자에는 네모진 흰색 껌이 들어 있는데, 우리는 흔히 이것을 바둑껌이라고 불렀다. 이 껌은 맛있고 오래 씹을 수 있는 양질의 껌이었다. 국산 껌은 이때만 해도 몇 번 씹으면 단물이 빠지고 끈기도 없어졌지만, 바둑껌은 맛도 오래갈 뿐 아니라 오래 씹어도 심심치 않았다. 병사들은 편지봉투에 바둑껌을 몇 개씩 함께 넣어 우편물로 보내기도 하였다.
여자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다보면 모르는 이름의 답장이 오기도 하는데, 편지봉투를 뜯어 읽어보면, 오빠 편지는 잘 받았어요, 언니는 언제 드레스를 입게 되었어요, 그래서 언니 대신 제가 오빠에게 편지 자주 쓰겠어요, 저는 OO대학 OO학과 O학년이예요, 하는 편지들이 흔히 있었다.
동생같이 지내왔던 O실이한테서는 답장이 없고, 대신 수도여고 학생인 넷째가 편지를 보냈다. 오빠가 보낸 편지는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언니가 답장도 안 써서 제가 언니대신 써서 보내니 잘 받아 보아주세요, 하고는 미술시간에 그렸다는 그림을 동봉해서 보내주기도 한다.
대학동창인 O희는 굵은 만년필로 문학도답게 대여섯 장씩 장문의 편지를 보내준다. O희는 내가 포항에서 소대장할 때에도 많은 편지를 보내주었었는데, 파월되면서 사지로 가는 몸인지라 모두 불태우고 왔었다.
O희는 E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우리 대학에 학사편입을 하여 3, 4학년을 같이 공부한 연상의 여자친구였는데, 착실한 가톨릭신자인데다가 전형적인 숙녀였다. O희는 꾸준히 편지를 보내 한국의 소식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1월에는 김신조가 청와대 뒷산까지 왔다는 것도, 박문혁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것도 편지로 알려주었다.
병사들은 편지를 쓸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작전기간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작전이 없다 하더라도 3개소대가 번갈아나가는 주간 정찰(偵察, 몰래 적군의 실정을 살핌)을 하거나 야간 매복(埋伏, 적군을 기습하기 위하여 요긴한 곳에서 숨어서 기다리는 일)을 해야 한다. 틈이 나면 병기손질을 해야 하고 빨래도 하다보면 정신없이 하루가 돌아가고 머릿속은 항상 전쟁생각 뿐이어서 글씨가 안 써지고, 편지를 써도 항상 ‘월남소식 전과 등, 고국소식 무소식’이라고 몇 줄 적어 보내는 게 고작이지만 고향에서 편지 오기만은 무척 기다린다.
전방중대에는 매일 식수와 탄약, 기타 보급품과 편지를 헬리콥터로 날라다준다. 중대본부에 파견나와 있는 앵그리코 맨(항공함포 연락만)들은 미 해병 대원들로, 미 해군의 함포나 해병대 항공단의 공중폭격을 요청하거나, 메드 백을 부르는 임무를 한다. 헬기가 날아올 때면 앵그리코 맨은 연막탄을 던져서 빛깔 있는 연기로 헬기의 착륙을 유도한다.
헬기가 착륙할 때면 흙먼지가 하늘을 덮고 가벼운 물건들은 멀리까지 날아가는 중에도 병사들은 헬기에 달려가 신속하게 보급품을 내린다. 편지 보따리가 있으면, 병사들이 좋다고 환호성이고, 편지가 없는 날이면 병사들은 시무룩해진다. 편지는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매우 좋은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