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방어 임무를 7중대에게 인계하고 전방 중대진지로 교체하게 되었다. 월남전 소대장으로 부임한 지 넉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새로운 중대 방어진지는 106고지가 가까워서 낮에도 수시로 저격이 날아오고 박격포탄이 떨어지기도 하는 곳이었다. 베트콩들은 바탄칸반도에서 막대한 무기를 잃은 후에 공격이 더욱 맹렬해져 중대 방어진지를 튼튼히 하여야만 했다.
산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해서 원형으로 교통호를 파고, 3개 소대가 사주방어(四周防禦)를 할 수 있도록 개인호와 유개엄체호를 만들고, 교통호에는 적의 수류탄이 떨어지면 발로 차서 넣을 구멍들도 곳곳에서 만들었다. 각 분대 방어진지에서는 각 조별로 유개엄체호를 만들어 적의 박격포탄도 피할 수 있고 또한 내무반 구실도 할 수 있게 하였다.
소대에 배속된 경기관총 2문은 일정한 간격으로 방어사격하기에 알맞은 곳을 골라 배치하고 유개엄체호로 튼튼하게 구축하였다. 각 분대 방어진지에서는 소대본부 지휘소로 연결되는 교통호를 만들었다. 소대본부에서는 소대장 벙커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선임하사요, 오른쪽에는 전령의 벙커들을 파고, 나무를 잘라다가 서까래를 만들고 모래주머니를 몇 겹으로 쌓아서 유개벙커를 만들었다.
방어진지에서 수류탄 투척거리 30m 전방에는 침투 철조망을 낮게 깔아서 베트콩이 넘어서 못 오게 설치하고, 10여m 바깥쪽으로는 원형 철조망을 세 겹으로 쳐서 중대진지를 한 바퀴씩 돌아가도록 설치하였다. 또한 침투 철조망 밑으로 대인지뢰와 수류탄으로 부비트랩을 곳곳에 설치하고, 원형철조망에는 빈 깡통을 달아매어서 적의 접근을 사전에 소리로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중대본부는 고지 정상에 견고하게 유개벙커로 만들어, 중앙에서 관측하고 지휘할 수 있도록 지형을 잡았다.
어느 날 밤중에 1소대 전방 철조망 전방에서 부비트랩 터지는 소리가 났다. 흔히 있는 일로 동물들이 통과하다가 사고를 내는 경우가 있고, 더러는 베트콩이 방어진지를 확인하려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밤중에 빈손군청이 베트콩에 기습을 받았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새벽에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빈손군청을 습격한 베트콩이 우리 중대 앞으로 통과하여 도주하니, 6중대는 도주하는 적을 차단하여 분쇄하라는 명령이었다.
김성진 중대장(해사 14기)은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작전을 개시하였다. 1소대와 3소대는 전위소대이고, 다음이 중대본부, 그리고 후위는 우리 2소대였다. 새벽 5시 30분경 중대진지의 비밀통로를 열고 나가서 5~600m쯤 가다가 간밤에 베트콩이 매설한 지뢰밭에 들어가게 되어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1소대장 조재준 중위(해병학교 35기 동기생)는 전신 파편상으로 신음하며 누워있고, 관측장교 구장봉 중위(해병학교 35기 동기생)도 피투성이가 되어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김성진 중대장은 정상이지만 하체의 주요 부분에 파편이 박혀서 누워있었다. 중대 장교 중에 나 혼자만 이상이 없었다. 대대 상황실과 포병대대 상황실에서는 상황을 즉각 보고하라고 무전에서 아우성이지만, 통신병 모두가 부상을 당했다.
순식간에 장교 4명, 사병 22명, 도합 2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메드 백을 요청하였지만, 미 해병대 역시 상황이 안 좋아서 쉽게 날아주지 않자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빨리 후송되어야 한 명이라도 더 생명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중대장을 보니 눈물이 앞섰고, 지휘관을 잃으니 허망했다.
대대본부에서 대기 중이던 국중표 대위(해사 14기)가 신임 중대장으로 작전현장에 헬기로 부임하게 되었다. 점심 때가 되어 중대장의 전령이 이탈리아 국수(Italian nuddle)를 드렸으나 피투성이가 된 장면을 처음 보고서는 음식이 역겨워서 못 먹었다고 하는데, 그 후로 이탈리아 국수는 전혀 입에 대지 못했다. 중대 병력을 한꺼번에 26명이나 잃고 나니, 6중대는 사기가 침체되었고 대대 작전 시에는 중대장마저 신참인지라 전투능력이 없어 항상 후위중대 노릇만 해야 했다.
2대대는 지금까지 중대급 작전과 대대급 작전을 쉴 새 없이 하였고, 소대급 매복과 주간 정찰이 연속되었다. 적과 근접전을 펴면서 숨가뿐 전투도 해냈다. 소총소리가 삐_이_융! 삐_이_융! 나면 500m 이상의 먼 거리에서 날아오는 것이고, 딱! 딱! 소리가 나면 100m 이내에서 날아오는 소리였다. 이럴 때면 총알에 맞는 나뭇가지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가슴에 무엇을 맞은 듯하여 살펴보니 방탄조끼 주머니에 넣어둔 압박붕대에 언제 날아왔는지, 적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가까이서 저격총탄이 숨가쁘게 날아올 때 어떤 병사는 엎드려 있다가 발을 들어보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혹시 다리에 총알을 맞으면 죽지는 않고 후송되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는 안 그랬었겠지만 그러한 생각이 들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작전 중 잠시 쉬게 될 때면 병사들은 탄창에 총알을 끼워 넣거나 병기 손질을 하는데, 만약 총기에 이상이 생기면 자신은 족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정글에서는 먼저 보는 놈이 먼저 방아쇠를 당겨야 살 수 있다.
우기에 매복은 참으로 힘들었다. 밤새도록 굵은 비는 내리고, 온 몸은 비에 흠뻑 젖어 추위에 떨리고 아래턱과 위턱이 저절로 움직여 부딛혀서 소리를 내고, 땅바닥에 물이 고여 허리춤까지 차오르고, 벌레들은 옷 속으로 스며들어 올라와 고통스러웠다.
대대 전술지역은 눈을 감아도 손금 보듯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어디 가면 초가집이 있고, 어디에 가면 우물이 있고, 어느 것이 부비트랩 지역이고, 어떤 곳에는 적의 매복이 예상되는 지역인지 등등. 작전 중 소대장은 지도를 수리소 보고 익히고, 쉴 때에도 지도를 보고 수시로 점검을 한다.
어느 날 우리 소대가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주간 매복을 하고 저녁이 되어 철수준비를 보고했더니, 신임 중대장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야간 매복을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점심 한끼 식사 분만 휴대하고 나왔고, 대낮에 주간매복하면서 노출될까봐 꼼짝도 못하고 지글지글 끓는 태양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어 피곤이 쌓여 있는데, 굶고서 야간 매복까지 하라는 명령에 분통이 터졌다.
신임 중대장이 전술을 너무 모르는데, 약이 올랐다. 역시 전쟁은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현재 위치를 중대장에게 보고했더니, 개울에 물이 흐르느냐고 묻는다. 월남에서 지형도에 표시된 개울은 우기 때에만 물이 흐르고 건기에는 흔적도 없다는 것을 독도법(讀圖法) 교관까지 한 분이 모르는 모양이다. 중대장은 독도법 교관이었다. 해병학교 강의시간표에 독도법이 들어 있어서, 독도법이 있으면 울릉도법이 있어야 한다고 자문자답한 생각이 났다.
26명의 큰 손실이 있는 다음에 1소대장에 김중위(해사 19기), 3소개장에 이상원 소위(해병학교 36기)가 새로 부임하였다. 1, 2, 3소대장이 모두 동기생일 때에는 재미있게 지냈는데, 동기생 소대장들이 부상당하여 후송가고 없으니 영 재미가 없었다. 소대장 생활도 어느덧 8개월이 다 되어 갔다. 나와 함께 월남에 왔던 동기생들은 소대장 근무를 이미 마치고 모두 대대본부나 여단본부로 옯겨 참모부서에 근무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소총소대장이어서 은근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작전이 없는 어느 날, 1개 분대병력을 차출하여 정글을 걸어 대대본부로 가서 부대대장 황문식 소령(해사 9기)를 찾아갔다. 부대대장은 소총 소대장이 무장을 하고 들어오니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찾아온 경위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더니, 알겠으니 곧 조치하겠다고 위로해주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소대장 한명이 “소대장님! 우리 모처럼 여기까지 나왔는데 여단본부도 들르고 육군 십자성부대도 한번 가보고 바람을 쐬고 가자”고 하여 좋은 생각이라 생각하고 여단본부를 거쳐 육군 십자성부대를 찾아 들어가는데, 어떤 육군 병사가 형닙! 하고 달려들었다. 알고 보니 고향 후배로 친구의 동생인 김정태였다. 참으로 우연히 고향후배를 타국 땅 전쟁터에서 만나게 되니 너무 반가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