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여단본부로부터, 각 중대에서 최고참 소대장은 회의준비를 하고 여단본부로 집합하라는 연락을 받아 헬리콥터를 타고 여단본부에 가서 신고하였더니, 각 중대 고참 소대장들이 모두 모였다.
김연상 여단장(해병학교 1기)께서는, 그동안 소대장으로서 전투하느라고 수고가 많았다고 격려하시면서 일주일간의 특별휴가를 명하시고 100달러 씩 주시면서 다낭에 가서 사복을 사서 갈아입으라고 하신다. 매 해병대 PX에 가면 사복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대씩을 선물로 주시고는 벨베트 독일제 옷감도 한 벌씩 주셔서 감격스러웠다.
김연상 장군은 안성 출신으로 6.25직후 고향의 부잣집 처녀와 혼삿말이 오갔는데,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해병대 초급장교에게는 딸을 주지 않고 시골 부잣집으로 시집을 보냈더란다. 20여년이 지나고 보니, 자기 딸은 농사일 많은 시골 부잣집에서 죽도록 일만 하는 촌부가 되었는데, 사윗감이었던 사람은 장군이 되어 별판을 단 지프차를 타고 헌병의 호위 하에 귀향하는 것을 보고 후회했었다는 일화가 있었다.
우리는 미 해병대 수송기 편으로 다낭으로 가서 여단장 회의실에 숙소를 정하고, 우선 미 해병대 PX를 찾아가 옷을 사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다낭시내를 구경하였다. 다낭은 항구도시인데 전쟁터 같지 않은 영 딴 세상이었다. 젊은이들은 데이트를 즐기고, 학교 가는 여학생들은 흰 아오지아에 고깔모자를 쓰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여러 명이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다낭 부두에서 일하는 한진그룹 소속의 한국 근로자들도 많이 보였다. 어느, 하루는 다낭시내 호텔에서 숙박을 하였는데 20달러를 받았다. 언제 베트콩이 들이닥칠지 몰라 문을 굳게 잠그고 머리맡 매트 밑에는 권총에 실탄을 장전한 후 잠금장치를 하고 잠을 자려했지만, 불안해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았다. 1주일간의 휴가는 꿈결같이 지나가고 다시 전방중대로 돌아와 소대장으로서 작전에 참가해야 했다.
월남전 소총소대장 9개월이 지나고서야 대대본부 인사관으로 빠지게 되었다. 소총소대장 9개월은 여단 내에서 최고참 소대장이었다. 정들었던 소대원을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피와 땀으로 어우러진 부하 전우들을 남겨두고 훌쩍 떠난다는 것도 가슴이 쓰렸다.
후임 소대장으로 온 33기 선배장교 김공수 중위에게 인계하는 것도 어색했다. 해병학교 33기 선배는 소대장 기수가 아니고, 적어도 부중대장급이었다. 이 분은 서울의 명문 S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어대 중국어과를 나오신 분으로 파월되기 전에 월남어 교육을 받고 오셨는데, 월남어는 중국어와 유사하여 단어나 발음이 비슷한 점이 있어서 4개월 교육받고서도 월남에 오자마자 월남의 자매마을 결연식 행사에 즉석 통역을 한 일도 있었다.
아홉 달 동안 소총소대장으로 정글을 누비다보니, 야성이 생겨서 실내에서 근무하는 대대 인사장교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익숙하지도 않았다. 대대장 고철훈 중령(해병학교 7기)은 사리가 분명하신 분으로 부하 사랑이 남다른 분이셨는데, 대대장 임기를 마치고 여단 참모로 가고 후임에 김관진 중령(해사 7기)이 새로 부임하였다. 또 부대대장 황문식 소령도 여단본부로 가고 새로 강인준 소령(해병학교 12기)이 부임하여 대대장과 부대대장이 같은 시기에 교체된 상태였다.
새로 부임하신 대대장은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의욕에 지시사항이 많았지만, 내 판단으로 옳은 것만은 시행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시행하지 않았다. 대대장이 확인행정을 하느라 물어 오시면, 시행하지 않은 것은 일단 잊었다고 얼버무리면 다음부터는 지시사항을 꼭 수첩에 메모해서 잊지말고 시행하라고 하신다. 옳은 말씀이시다.
낮에는 인사행정 사무에 시달려야 했다. 인사장교의 임무는 장교의전, 출입이 전부이다시피 했는데, 2대대는 작전이 많다보니 인명손실이 자연 많을 수밖에 없었고, 전사자와 부상병 후송처리는 물론이고 만기 근무자의 귀국, 신병 인수 및 배치 등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부대대장이 밤이면 105mm박격포의 요란한 사격소리에 잠을 못자고 불안해하던 나머지, 대대본부 방어는 7중대가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대본부 장교들도 야간방어 근무를 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낮에는 종일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밤에도 야간방어근무까지 강요당하였다.
12월 하순이 되어 1967년도는 저물어가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월남은 추위와 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나라였다. 마지막 해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있었던지, 대대장은 자매마을 푸억토 전략촌 주민을 대대본부로 초청하였다. 푸억토마을은 원래 평화롭던 가톨릭촌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을 청룡부대가 주둔하면서 베트콩지역에서 피난 온 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략촌으로 꾸민 것이었다.
임시 주택을 짓고, 마을 외곽에는 대나무로 울타리를 튼튼히 세워 자체방어를 하였으며, 식량은 대대 민사(S-5)에서 쌀을 보급해주었다. 마을에는 신부(神父)가 있어서, 마을의 지도자로 어린이들을 회초리로 매섭게 다스렸다. 신부에게는 절대 복종이었고 신부는 마을의 통치자였다.
나는 적성에 맞지 않는 인사관 자리의 사의를 표하고, 소총소대장으로 한 달만에 복귀하였다. 청룡부대에서는 아마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대대인사관을 지후룡 중위(해병학교 33기)에게 인계해 준 후 다시 6중대 2소대장으로 복귀하고, 대신 김공수 중위는 대대 민사장교로 오게 되었다.
소대장으로 다시 오니 소대원들은 좋아서 기뻐 날뛰었다. 해병여단은 추라이에서 호이안으로의 부대이동 작전명령이 하달되어, 비행탑승조를 편성하고 장비들은 선정해서 비행기 탑재준비를 해야 했고, 여지껏 방어했던 중대진지는 파괴하여야 했다. 3대대가 먼저 이동을 했고 다음 차례가 우리 2대대였다. 크리스마스를 추라이에서 보내고 연말에 군용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여단장님의 방침은, 호이안으로 가게 되면 작전은 30%이고, 대민사업이 70%라고 하여 사람구경을 좀 하는가 싶어서 장병들은 모두들 은근히 좋아했다. 추라이지역은 국경지대의 산악이 가깝고 전술책임지역도 강원도와 같은 산골인데다가 작전지역은 모두 베트콩의 소굴이었다.
작전 중에 마을에 들어서면 주민들은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고, 지나가면 뒤에서 총을 뒤퉁수에다 쏘아대기 일쑤였고, 곳곳에 부비트랩이 깔려있었다. 월남에 도착한 신병들은 이 부비트랩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전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정글전쟁은 넉 달 정도가 지나야 상황판단이 서고, 부비트랩의 녹색 연결선이 보이고, 발목지뢰에 솟아오른 세 개의 바늘이 보인다. 신병들은 월남 도착 후 고향에 보낸 편지의 답장이 오기도 전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대대장교 인사장교로 근무하다가 소통소대장으로 복귀하여 부대이동을 하는 바람에 작전 중에도 꼬박 써왔던 일기장을 잃어버려 아쉬웠다.
추라이지역은 미 육군 128/여단에게 인계하고, 우리는 북방으로 140km를 이동하여 미 해병 제3 상륙군(Ⅲ MAF)과 합동작전을 펴기 위해 호이안지역으로 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