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안으로 공수 이동하여 태평양 연안 남지나해의 모래 언덕에 중대진지를 임시로 잡았는데, 인접한 곳에는 3대대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추라이는 아홉 달 간이나 있어서 지형에 익숙하였지만, 이곳으로 오니 모든 게 생소하였다.
평지인데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주민들도 많이 보여, 여단장 말씀이 사실인 듯하였다. 행정구역은 광나이성 호이안이고, 북쪽으로 20km쯤에는 월남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다낭이 있었다. 호이안으로 옮겨오고 나흘 만에 1968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저녁 무렵에 먼저 온 3대대 병사들이 저녁밥 지을 물을 얻으려고 인근마을로 들어가다가 저격을 받아 관통상을 입고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져 이곳이 만만치 않은 곳임을 예고해주었다. 여단본부가 도착하고 1대대가 최후로 도착하여 청룡부대는 호이안 이동작전을 마무리하였다.
2대대는 1번국도가 있는 디엔반 군청 쪽으로 탐색전을 펼쳐나가면서 기동을 하여 서부 산악쪽에 있는 디쉬엔 군청 부근에 중대진지를 잡았고, 뒤이어 대대본부도 따라와 인근에 진지를 잡게 되었다. 디쉬엔 읍내에는 큰 상점도 있고 시골 영화관도 있어 사람 사는 곳인 듯 했다. 정말 여기서는 대민사업만 하게 되는 듯하였다.
6중대는 다시 군청이 있는 읍내를 지나고 큰 개울을 건너 짜큐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중대진지를 잡고 부지런히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북쪽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개울 너머로 밀림 속에 간간히 논밭들이 펼쳐져 있었다. 중대본부를 중심으로 3개 소대를 둥글게 배치한 후 교통호를 파고 분대별, 조별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경기관총 부대는 고무나무를 잘라다가 유개엄체호를 만들고, 모래주머니에 모래흙을 담아 지붕을 겹겹으로 덮었다.
개울가여서 모래는 많았고, 교통호를 파는데도 모래가 많이 섞여있어 작업은 쉬웠다. 남쪽으로는 공동묘지의 작은 봉분들이 떼지어 있었고, 짜큐마을에서 군청읍내를 오가는 주민들이 많았으며, 작업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추라이와는 딴판이었다. 마치 강원도 산골에서 사람구경도 못하다가 도시로 나온 기분이었다.
급히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무기를 점검하고 야간 방어사격 구역도 정하고 사계청소도 대략 마쳤다. 침투철조망은 설치하지 못하고, 간신히 원형철조망만 겨우 한 줄로 중대 방석(방어진지)을 빙 둘러 설치하였다.
M16소총실탄과 경기관총 실탄을 점검해보니, 야간방어사격하기에 태부족이었다. 추라이에서 호이안으로 이동해오는 동안 짐을 간단히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호이안으로 이동해서는 탄약보급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그 다음 날에는 3대대 9중대의 1개 소대 병력을 증원받아서 증강중대가 되었다. 장보에 의하면, 우리 6중대를 월맹 육군 연대급 병력이 야간에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1968년 1월 30일은 설날이었다.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중국, 홍콩, 월남 등 동남아에서는 큰 명절이었다. 설날에는 베트콩들이 일체 접적행위를 하지 않았던 것이 관행이었다.
섣달 그믐날 초저녁에 우리 소대에 매목명령이 내려왔다. 매복지점은 중대진지에서 겨우 500m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중대장에게 이곳은 소대 매복지점이 못 되고, 청음초(聽音肖) 지점밖에 안 되니 1소대에서 청음초를 내보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분이 내키지 않고 예감이 이상하여 소대 선임하사관을 매복대장으로 하여 2개 분대병력으로 내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복지점에서 조명탄이 솟아오르고 크레모아가 터지면서 동시에 M16소총이 불을 뿜어대는 요란한 사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나는 나머지 분대병력을 이끌고 급히 달려가 살펴보았더니, 베트콩들이 몰래 기어오다가 조명지뢰의 인계철선을 건드려 폭발하여 조명탄이 솟아오르고 우리 소대 매목대에게 걸려들게 되자, 줄행랑을 친 상태였다. 전과를 확인하였더니 시체는 보이지 않고 샌들만 몇 짝 있을 뿐이었다. 상황을 상세히 알아보았더니, 매복분대 앞쪽으로 네 명이 숲을 따라 기어오는 것을 계속 유인하여 생포하려고 하였으나, 우리가 설치한 조명지뢰에 걸려 터지는 바람에 적병을 사격하였는데, 그들은 부상자 1명을 업고 숲속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중대장에게 상황을 무선으로 보고하고, 매복대는 이미 노출되었으니 철수하겠다고 건의하였다. 철수명령이 내려져 매복대를 인솔하여 귀대해서 잠시 쉬고 있는데, 또 다시 매복분대를 나가란다. 이 날은 왠지 대낮 분위기가 어수선하기만 했었다. 이번에는 매복지점이 1소대 바로 코앞이었다. 여기는 청음초 거리도 못되는, 방어사격의 화망(火網) 안쪽이 되는 곳이었다.
중대장의 전술은 수준급 이하가 되어 답답하였다. 해사 14기 출신인 우리 중대장은 전술도 모르고, 부하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오직 굴러들어오는 무공훈장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만 같았다.
매복대를 내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조명지뢰가 터지고 매복대는 중대 진지로 뛰어 들어왔기에, “왜 철수하였느냐”고 야단을 치니까 1소대에서 철수하라고 아우성을 쳐서 철수하였다고 한다. 너희들이 매복지점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조명지뢰를 건드린 게 아니냐고 호통을 치니까 “아닙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생과 사가 오가는 마당에서 거짓말은 아니겠지 하고 또 다시 청음초가 아닌 매복대를 내보내야 했다.
소대장 벙커에 돌아와 불편한 심기로 잠시 쉬고 있는데, 꽝! 하는 소리가 들린다. 81mm박격포 요란 사격소리가 아니라 떨어져서 터지는 박격포탄 소리였다. 전쟁터에서 열 달을 지내다보니 소총소리, 사격 거리와 방향, 총기의 종류도 구분할 수 있었고, 박격포 소리도 구분할 정도가 되었다. 급히 단독무장을 하고 나와 교통호에서 살펴보니, 가까운 곳에서 적탄이 날아오고 동시에 두 군데 방향에서 적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매복나간 병력이 걱정되었다. 빨리 철수해야만 양쪽 군대의 사격을 피할 수 있을 터인데, 걱정이 태산이다.
중대 방어진지는 자리 잡은 지 며칠이 안 되어서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월맹군들은 밤새도록 우리 중대를 근접 포위하며 공격하여 들어왔다. 추라이에서는 중대진지가 산마루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방어하기에 좋도록 자리를 잡았었지만, 이곳은 평지여서 방어진지를 구축할 만한 지형이 못되었다. 북쪽의 개울은방어선 구실을 할 수 있는 장애물이었지만 물이 없었고, 더군다나 개울 건너편에는 대나무 숲이 있어서 관측이 되지 않았다.
적의 공격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적군들이 우리를 볼 때, 평지에다 허술하게 구축한 중대방어진지가 만만해보인 게 틀림없었다. 여단포병대는 RKT공격을 받느라 포병의 화력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대대본부의 4.2인치 박격포부대에서 조명탄을 쏘아 올려 밝혀주면 대낮같이 밝아 적병을 조준 사격할 수 있지만, 조명이 끊어져 어둠이 가득차면 적들을 향해 저항사격을 하게 되어 총알을 많이 쏘아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실탄을 아껴야했다.
경기관총 2분대장 김영식 하사가 적탄에 맞아 실명하게 되었고, 적의 M75무반동총 직격탄에 맞아 경기관총의 총열이 파괴되어 사격이 불가능해졌으므로, 실탄은 1분대 경기관총 진지로 옮기도록 명령하였다. 소대본부 지휘소에 있던 선임하사는 조명탄 잔해가 머리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화상을 입게 되었고, 소대본부에는 후송된 부상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용감한 3분대장이 교통호 밖으로 뛰어나가, 공동묘지 뒤에서 총을 쏘아대는 적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제자리로 뛰어 들어오기에, 야단쳐서 위험한 행동이니 그러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묘지 뒤에서 총을 쏘아대니 조준사격을 해도 명중이 안 되므로 울화통이 터져 교통호에서 뛰어나가 수류탄을 던진 것이다.
수류탄의 효력은 만족했다. M16소총 실탄이 거의 바닥이 나기에, 각 분대는 야전삽을 꺼내라고 명령하고 육박전을 준비시켰다. 그동안 몇 시간이 지났는지 먼동이 트기 시작하더니 적의 공격이 누그러졌다. 적군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방어는 성공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