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의 이야기 (2화)
  제1장 고향 이야기

내가 태어난 곳은 남양주 호평동이다. 태어난 시간은 밤 12시가 지나서 1시경이니 자시(子時)에 해당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었고, 어머니는 산기가 있는지라, 이웃집에 가서 시간을 보니 12시를 울리는 벽시계 소리가 들렸고 한참 후에 내가 태어난 것이다.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계해(癸亥)생으로 18세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생존해 계셨다. 고모가 두 분 계셨는데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모두 출가한 상태여서 내가 태어남으로써, 우리 가족은 다섯 식구가 된 것이다. 3대독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집안의 경사는 물론이고, 동네 경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태몽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담을 뛰어넘어오는 꿈을 꾸시고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식구들 중 나를 가장 귀여워 해준 분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늘 ‘너는 발에 흙을 안 묻히고 키우셨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삼대독자의 장손이려니와 인물도 귀엽게 생겨서 할머니께서는 나를 등에 업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손주 자랑하시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고 한다.

고모가 시집간 곳은 물골안(수동면 파위)였는데, 젖먹이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할머니는 고모댁엘 데리고 다니셨고, 진외가는 가평읍 승인리였는데, 1년에 수차례씩 친정에 다니실 때마다 장손인 나를 꼭 데리고 다니셨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입학식이나 봄, 가을 소풍, 그리고 운동회 때에는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할머니께서 너무나 극진히 사랑해주신 것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할머니께서는 두 가지 기술이 있으셨는데, 하나는 술을 잘 담그시는 기술이다. 동네에서 혼인이나 환갑 치르는 집이 생기게 되면 그 집에서는 할머니를 모셔다가 큰 둑에 막걸리를 담갔다. 가끔 집에서도 할머니께서 술 담그는 것을 보면, 내 키보다 큰 독안을 볏집으로 불을 태워 소독하시고는 잘 된 고두밥과 질금(엿기름)을 잘 버무려서 막걸리를 담그셨다.

다른 하나는 옷감 짜는 기술이다. 우리집 방 하나에는 늘 베틀이 놓여 있었는데, 집에서 누에를 키우고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명주실을 내어 명주를 짜셨다. 누에고치 실을 뽑으려면 고치를 가마솥에 삶아서 실올들을 모아 물레를 돌려 명주실을 뽑아내셨다. 실이 다 뽑아져 나오면 가마솥에는 번데기가 남게 되는데 이것은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었다.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짜신 명주가 몇 필씩 있었다. 할머니가 짜신 명주옷으로 겨울철을 따뜻하게 날수 있었다. 할머니는 마지막 유품으로 내 명주옷감 한 필을 장가갈 때 슨다고 마련해 주셨는데, 내가 장가를 늦게 가는 바람에 소원을 이루지 못하시고, 저승으로 가셨다.

우리 집에는 목화 농사도 많이 하였는데, 가을에 목화송이를 따서 겨울이 되면 밤새 씨아를 돌려서 면화씨를 빼고는 면화 솜을 물레로 돌려서 실을 뽑아내는 일을 하셨다. 겨우내내 밤늦도록 하시는 일이었다. 나도 면화씨를 뽑느라고 씨아를 돌려서 일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내가 해병대 장교 복무 5년 1개월을 마치고 상명여자고등학교에 복직해서 근무하던 어느 해 겨울, 유난히도 할머니가 보고 싶어 시골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검정색 바지와 자켓에다 스웨터까지도 검정색이고 검정구두를 신고 나서게 되었는데, 그 시간에 막내 동생은 할머니의 위독함을 전하려, 새벽에 경춘선 첫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시골집에 도착하니 할머니는 그새 운명하셨다. 얼마나 손자가 보고 싶기에 텔레파시를 보내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할머니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시고 교훈을 시키신 분이다. 시골농촌에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사셨지만, 튼튼한 실농군은 못되시고 한학에 관심이 더 많은 분이셨다. 어린 시절 나에게 많은 중국 고사들을 들려주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삼국지’, ‘수호지’, ‘장화홍련전’, ‘옥루몽전’, ‘사씨남정기’ 등 딱지본 책들을 많이 읽어주셨다.
 
▲ 사씨남정기

이웃마을 담안에 사시는 내시댁이라 불리던 서한태 씨 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집에 심부름을 종종 다녔다. 그 집에는 별채의 서고(書庫)가 따로 있고,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을 가르쳐주셨다. 천자문을 다 외서 쓰지는 못했지만, 천자문 일천 글자를 모두 암송하고 책거리도 하였다. 목침에 올라가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아가면서 천자문을 외우곤 했었다.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한문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어공부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부(大富)는 하늘이 내는 것이고, 소부(小富)는 근면하면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근면검소를 가르쳐주셨고, 실천에 옮기게 하셨다.

우리집은 입구(口)자형 네모 집의 꽤 큰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는데, 새벽녘 동틀 무렵이면 대문 여는 것은 내 몫이었다. 일찍 대문을 열어야 복(福)이 많이 들어온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아침에 앞마당과 사랑채 마당을 비로 쓰는 것도 내 몫이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깨끗이 쓸고 나면 마음도 넓어지고 후련해졌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표현력과 사고력을 교육시키신 분이다. 예를 들면, 쌀밥이 밥상에 올라오기까지 파종에서부터 벼의 성장과정을 이야기하도록 하고, 빠진 것을 보충해서 설명해주시고는 다시 이야기하도록 논술훈련을 시키셨다. 쌀은 농부의 손이 88번 가기 때문에 한문으로 쌀미(米)자가 팔십팔(八十八)이라고 하셨다. 쌀은 소중한 것이어서 밥그릇에 밥풀을 남겨서도 안 되고, 밥상 위에 흘린 밥알도 주워 먹도록 교육시키셨다.

할아버지께서 운명하실 때 안색이 붉어지면서 쉽게 운명을 하셨는데, 생전에 산삼을 많이 잡수셔서 그렇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스물여덟 살이던 해 8월, 마흔 여섯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내가 5월 8일 월남전에서 1년 하고도 한 달 만에 귀국애서 석 달이 될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큰 병원에만 조금 일찍 입원하여 치료하셨어도,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을,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지 않았거니와 농촌에서 돈도 귀하였기 때문에 입원은 애당초 생각지도 않았다.

결국 투병하시다가, 병을 키운 후에야 이 병원 저 병원 다니시다가 결국 서울 남산자락 모 대학 부속병원에서 수술결과가 좋지 멋하셔서 병사하셨다. 어려운 농사 일을 잘 하시지도 못하면서 나를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일곱 남매 키우느라 많은 고생하시다가 황천길로 가셨다.

아버지는 3대 독자로 금곡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19회) 대처에는 할아버지의 반대로 못 나가시고 줄곧 고향 땅 널울에서 농사일에만 전념하셨다. 튼튼한 편이 못되어 실농군은 못되셨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 하셔서, 그때 받은 우등상장, 성적표, 상품(대나무 필통) 등이 지금도 집에 보관되어 있다.

어머니는 지금 연세가 일흔여덟이시다. 연로하시니 근력이 무척 쇠잔해지셨다. 작년에는 감기가 심해서 페렴이 지나 결핵증상까지 보여 서울 보훈병원에 보름간이나 입원하신 적이 있었다. 곧 돌아가시는 줄로만 알고, 경주에 두었던 순 검정색 양복을 분당집으로 갖다 놓기도 했었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했었다.

가오실 친정에서 태어나시고 자라서 열여덟 살에 널울로 시집 오셔서 아들 넷, 딸 넷 여덟 남매를 낳으셨는데, 딸 넷 중 동생 상금이가 여섯 살 무렵 일찍 저승으로 갔다. 내가 유난히 귀여워해주었는데, 앞 밭에서 감자를 캐어 쇠죽 바가지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도랑을 건너 뛰어 사랑 마당으로 오던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아마 어머니는 그런 상금이를 기억도 못하실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어릴 때 깐 상금이 이야기를 꺼내서 어머니를 울리고 싶지는 않다.

 
  우리 집안의 내력 (1화)
  내가 살던 고향집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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