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대위로 진급한지 넉달 보름이 지난 1969년 7월 15일 부로 해병 제1상륙사단으로 발령을 받고나서 사단 인사참모실에 도착신고를 했더니, 의무대대 작전장교 겸 본부 중대장으로 인사 발령이 이미 결정 나 있었다. 나는 보병중대장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보병중대장은 급한 인사여서 이미 인사가 끝났으니 우선 의무대대로 가서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의무대대 작전장교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의무대대장에게는 신고도 하지 않은 채 동기생들을 만나러 다니던 어느 날 오후, 서문 앞 오천에서 만원이 된 시외버스를 타고 포항시내로 나오던 중 버스 안에서 진해해병훈련소에 면회오던 부산 노인네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포항 시내에 도착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의 아들이 보급학교에서 한 달 간의 보급교육을 마치고 포항사단에 발령이 났는데, 해병대사령부에 근무하는 최 모 대위가 포항사단장 비서실에 근무하는 동기생 김 모 대위에게 부탁해서 사단에서 제일 좋은 부대에 배치되는 것을 보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느 부대냐고 물으니 의무대대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연이 아니고 인연인 듯했다. 나도 진해에서 전출온 지 일주일 째이고 의무대대에 인사발령을 받은 상태에 있다고 말씀 드리니 더욱 반가워 하신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안 좋아서 포항에서 부산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끝났고, 기차로 대구까지 가서 부산행 열차를 갈아타야했다. 그 노인은, 기차시간은 충분하니 저녁 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그제서야 옆에 서 있는 자기 딸을 소개하는 데 그녀의 이름은 이O희 이고 부산에서 명문 K여고를 졸업하고 E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유공(油公)에 근무한다고 한다.
내 뒤에는 1년여 만에 만나는 소중한 동기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태여서 이 부녀에게 말하기를, 이창범 해병은 내가 잘 데리고 있을 처이니 조금도 걱정 마시고 돌아가시라고 애원하다시피 하여 가시게 했다.
의무대대로 가서 대대장에게 신고를 하니, 대대장은 해군 중령 양태환으로 피부과 전문의였고, 부대대장은 해군 소령으로 전문의를 따고 소령으로 근무한지 얼마 안 되는 분이었다. 상급자는 대대장과 부대대장 두 분이고, 내가 세 번째 위치한 작전장교였다. 보병대대에서 작전장교는 고참 소령의 직책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였지만, 의무대대는 해병대위 T/O였고, 본부 중대장의 겸직이었다.
의무대대는 3개 병원중대와 본부중대로 편성이 되어 있었다. 병원중대는 중대장의 군의관이고 해군 위생 하사와 위생병으로 구성되었고, 본부 중대는 의무대대를 지원하는 해병으로 구성되어 앰블런스 운전병, 라디오 지프차 운전병, 공병, 보급병 등으로 구성되었다.
작전장교와 본부중대장의 업무를 파악한 후 대기 중이던 이창범 일병을 작전장교실로 발령을 내서 내 방에다 두고 일을 시켰다. 퇴근 시간이면 BOQ로 데리고 나가서 빨래도 시키고 자장면도 사주었고, 내가 입다가 작아진 미제 야전자켓도 주어 따뜻하게 보살펴주었다. 이창범의 아버지는 꼭 부산에 좀 내려와 달라고 매주 전화를 하신다.
해병사단에서 신병은 6개월이 되기 전에는 외출, 외박을 안 내보내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한 달 쯤 지나서 이창범 해병을 부산 출신 고참 해병들과 함께 토요일 오후 외박을 내보내고, 귀대 시에는 함께 데리고 오도록 했다. 부산에 꼭 와달라는 노인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두 달 쯤 지나서야 이창범 해병을 토요일에 외박 보내고, 그다음날 일요일 아침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 해병의 집은 부산 서면 양정동이었는데, 점심상을 잘 차려 대접해주었다. 점심을 마치고 범어사를 함께 구경하고는 작별을 고하고 이창범 해병을 데리고 귀대 길에 올랐다.
부산 시외버스 터미널은 범일동에 있었다. 포항 가는 시외버스 표를 사고 출발시간을 기다리다가 식당으로 들어가 소주 한잔씩을 하는데, 이 해병이 말하기를 “중대장님, 우리 아버지가 왜 중대장님을 집으로 모시려고 했는지 아십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네가 진해훈련소에서부터 인연이 되었고, 또 포항사단에 와서도 같은 부대에 있게 되어 고마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더니, 그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 누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기에, 괜찮은 여자 같더라고 가볍게 말해주었더니, 이 해병은 “중대장님 우리 혈연관계를 맺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게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냐고 물으니까, 대답은 이러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원래 신의주로 부산으로 피난 와서 그럭저럭 살게 되었는데, 잘 나가던 고무공장이 화재가 나서 요새 기운이 안 좋아졌고, 자기는 부산 동아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자기 아버지는 맏아들인 자기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한다. 그러던 중 최 대위를 진해에서 몇 차례 만나보니, 담배를 주어도 안 받고,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하여도 사양하고, 돈을 주어도 안 받는 것으로 보아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었다.
또 수료식 날에는 해병대 장교 정복을 입고 있는 최 대위의 모습을 부모님과 누나가 모두 와서 지켜보면서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씀 하셨고, 또 인연이 있어서 같은 부대에 근무하게 되어 아버지는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았고, 누나도 승낙을 하였다는 것이다.
부산을 다녀온 후 이 해병의 누나는 나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인즉, 자기 동생을 친동생 같이 아껴주어서 고맙다는 것인데, 자기 동생은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다녔는데, 해병대 입대하여 최 대위님을 만난 후로는 전혀 다른 새 사람이 되어서 부모님이 무척 기뻐하고 계시니, 계속 잘 보살펴달라는 것과 또한 부산 집에 내려와 주시면 후히 대접하겠다는 것이었다. 내 도리만 해온 것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이다.
사위로 삼겠다고 하고 딸 역시 부모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하니 나의 결심만 남은 것이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채 1년도 안 되었고, 칠남매의 장남으로서, 더욱이 가장으로서 내 집안 걱정이 태산 같아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집안 형편을 이야기하고 곧바로 결혼을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포항해병상륙사단에 근무한 지 석 달이 지날 무렵 육군정훈학교 입교희망자 추천 공문이 왔다. 육군정훈학교는 편제가 바뀌어서 육군종합행정학교 정훈반 과정으로 되었는데,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에 있어 서울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곳이어서 관심이 갈 뿐 아니라 정훈에 대해서도 매력을 느껴왔던 터였다. 대대장에게 구두 허락을 받아 결재를 올렸더니, 입교 명령이 떨어졌다.
정훈장교 특별보수반 과정은 8주간의 교육과정이었고, 교육기간은 1969년 11월 15일부터 1월 23일까지였다. 기쁜 마음으로 짐을 꾸려서 서울로 올라갔다. 나의 후임자로는 동기생 강인희 대위가 오게 되었는데, 졍훈교육을 마치고 국방부 정훈국에 근무하고 있던 중대 강 대위한테서 연락이 왔다. 최 대위가 데리고 있던 이창범 일병이 탈영을 했는데, 아직도 귀대하지 않고 있어서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누나를 최 대위한테 시집보내지 않고 육군 중위 군의관한테 시집보내게 되어,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리고는 부대에 미귀가 중이라는 것이었다. 열여덟 살 어린 나이에 해병대에 와서 나를 만나게 되어 친형이나 매형같이 지내왔는데, 갑자기 나도 떠나가고 그동안 부대에서는 귀여움을 받다가 갑자기 푸대접을 받게 되고, 집에서는 누나마저 다른 곳으로 시집가게 되니 허망하게 생각하였던 모양이었다.
해가 바뀌어 이듬해 여름, 국방부 정훈국 파견근무 중에 육군 모 중령, 공군 강 소령, 해군 이 소령, 해병대 나, 이렇게 네 명이 부산군수기지 사령부에 정훈검열을 나가게 되었다. 마침 군수기지사령부가 양정동에 있어서, 이창범 해병의 집을 잠시 방문하였더니, 이 해병의 어머니는 집에 계시나 아버지는 그동안 세상을 뜨셨고, 딸 O희는 시집가서 근방에 살고 있는데, 데리고 오겠다고 말씀하시기에 만류하면서, 나는 따님을 보러 온 것이 아니고 여차여차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어 시간이 나서 찾아뵌 것이라고 말씀 드리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조경학과 교수로 부임하고 나서 부산에 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부산에 사는 이창범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아오라고 시켜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몇해 전 의과대학에 새로 오신 여자 교수가 마침 부산사람으로, K여고와 E대 약학과 출신이고, 나이도 O희와 비슷하기에 이창범의 누나 이O의 행방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더니, 수소문 끝에 알아낸 것이 자기의 한해 선배인데, 현재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창범이도 누나를 따라 캐나다에 가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