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해가 바뀌어 1971년도가 되었고, 제대 명령이 월별로 명단이 결정되어 공문으로 내려왔다. 첫 번째는 1월말 이었고, 나는 3월 31일자로 제대 날짜가 결정되었다. 해병대 장교 복무기간은 임관하고 만 3년이었는데, 해병학교 32기부터 제대가 안 되어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했지만, 월남전을 준전시로 보아 패소하여 제대가 연기되어 버린 후 5년이 지나서야 만기제대가 실시되었다.
나는 해병대에 입대한 지 꼭 5년 1개월 만에 제대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제대하는 날짜가 3월 31일로 토요일이었지만, 나는 전방부대 초급지휘관 산업시찰 안내를 마치고 해병대 사령부 정원에서 불고기 야외만찬을 진행하느라고 제대하는 날까지도 야간근무를 해야 했다.
나는 해병학교에 입교해서 힘든 훈련을 이겨내어 영광스럽게 해병소위로 임관하게 되었고, 월남 전쟁터에서는 소총소대장으로 참전하여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살아 돌아왔으며, 5년여의 해병장교 복무를 무사히 마쳤으므로 사회에 나가서도 굳세게 살아갈 자신이 생기게 되었다.
5년 1개월 만에 해병대 장교생활을 마감하고 군복을 벗고 나니, 홀가분하고 긴장했던 것도 풀리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대학원에 복학하였으므로 일단 취직걱정은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해병대사령부에 근무하게 되면서 대학원에 복학하여 대학원생이 되었었다. 보급감실에 근무하고 있던 동기생 김병근 대위(현 윤할유공사 부사장)는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에 복학하고 나에게 알려주어, 해병대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4년 만에 복학하게 된 것이다.
해병학교에 입교하면서 휴학수속은 서울대 불문과 학생 O실이에게 맡겨 놓았었는데 월남에 근무하면서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에 편지로 휴학을 확인하고 복학절차를 문의하였더니, 군복무자의 복학기간은 제대할 때까지 무기한이니 걱정 말고 무사히 귀국하라는 편지를 받은 바 있었다.
제대할 때에는 대학원 등록도 3학기 째가 되었다. 지난 1년간은 군복을 입고 사울사대로, 수원농대로, 이화여대에까지 가서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전공은 수원농대에서 수강하고, 교육학 분야는 서울사대에서 수강하였다. <교육철학>은 이화여대 김은희 교수의 강의과목이어서 이화여대에 군복을 입고 수강했었고, 이화여대 황응연 교수님도 바쁘시면 자기 연구실에서 종종 강의를 하셔서 이화여대를 난생처음 들락날락거려보았다.
1학기가 끝날 무렵, 상명여자고등학교에서 생물선생님 한 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어 급하게 되었으니, 2학기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5년 반 만에 복직이 되어 기분이 좋았다. 여름방학동안 남산국립도서관에서 논문을 준비하던 중 상명여자고등학교 학생을 식당에서 만나게 되어 이것저것 학교사정을 물어본 일이 있었는데, 복직을 하고보니 대대장 학생이었다. 배상명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도 여자 분이셨고, 생물교사로는 이교창 선생이 있었다.
교련과목은 남자고등학교만 있더니, 여자고등학교에도 생겨서 제식교련과 구급법을 가르쳤고, 또한 교련검열이라는 것이 처음 시작되어 교련검열준비를 하게 되었다.체육선생이나 여군장교 출신인 교련 선생은 열병과 분열동작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교련검열은 내가 도와야 할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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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명여고 생물교사 시절 교련검열 지도를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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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군사정부 시대여서 교련검열을 잘 받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모든 수업은 단축수업으로 오전에 끝내고 오후에는 교련준비를 해야 했다. 학년별 10학급씩 30학급이 열병, 분열을 연습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나는 해병대에서 5여단 창단을 하느라고 한 달 이상 포항활주로에서 완전 무장으로 분열과 열병을 연습하였고, 또한 해병훈련소에서 수료식 때마다 매달 열병과 분열을 해왔던 터라, 교련검열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해병대 작업복과 팔각모에 세무워커를 신고, 선글라스 Ray Ban을 끼는 등 복장부터 제대로 갖추고 마이크를 잡고는 구명대에 올라서서 한 달간 열심히 지도하였다. 검열 하루 전에는 해병대 의장대와 군악대를 모셔다 의장대 시범도 보이고, 군악대 행진과 연주에 맞추어 분열 연습을 하니 학생들은 의기충천하였고, 검열 당일에도 해병대 의장대와 군악대의 지원으로 교련검열은 서울에서 제일 잘 하는 학교로 단번에 소문나게 되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해병대 사령부 의장대장이 해병학교 36기 이상우 대위(현 동아대학교 교수)로, 한기 후배 장교로 평소 나와 가까웠던 분이었다는 것이다. 검열관은 육군 장교 출신인 김춘일 장학사였는데, 나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이렇게 해서 교련검열을 3년 동안 지도해주었다.
교사로 일하랴, 대학원 공부 해내랴, 학위논문 준비하랴 무척 바빠졌고, 잠이 모자라 항상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드디어 1972년 8월에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석사학위를 받고 나자 새로운 고민이 생기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대학 때부터 꿈꾸어 오던 해외유학이었다. 병역을 마쳤으므로 유학준비를 해야 하겠는데, 장애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장애물이 아니라 유학조건에 한 가지도 맞는 게 없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게 해병대라지만, 유학도 해병대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힘들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계시지만 칠남매의 장남으로서의 멍에는 무거웠다. 바로 밑의 여동생은 출가했지만, 그 밑으로 여동생이 둘, 남동생이 셋 있었다. 바로 밑의 남동생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였고, 셋째는 중2, 막내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할 동생들이었다.
별별 생각을 다 해보고, 후회도 해보았다. 포항사단에서 O희와 결혼해서 함께 영어 공부를 하고, 제대하자마자 무작정 미국으로 갔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가버린 O희도 아쉬운 인물이었다. 군복무를 하고 있던 중에 동생같이 가까이 지내던 O실이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한 가족으로 동생같이 지내왔었기 때문에 결혼상대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지만, 섭섭한 심정은 금할 수 없었다.
유학을 가더라도 내 학비걱정보다는 집에 남아 있는 식구들의 생계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더 걱정이었다. 농사가 있으니 먹고야 살겠지만 농사는 누가 지으며 동생들의 학비가 막연하고 속수무책이었다. 차라리 혈혈단신이었으면 홀가분하게 미국행 비행기표 한 장 사서 가볍게 떠날 수 있겠다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