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개발본부 (46화)

고민하고 있던 중 중앙일보사 개발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식물원도 만들고 Flower Center를 만드는 획기적인 사업을 한다고 해병대 동기생 강인회가 알려주어, 유학이 불투명하던 차에 호기심도 생겨서 입사원서를 제출했다.

중앙일보사 개발본부장을 면담하고 간단히 구술시험을 거친 다음, 이병철 회장이 직접 면접을 했다. 여기서 통과되어야만 최종 합격이 되는 것이었다. 생일이 언제냐, 음력생일은 언제냐, 이런 것들도 질문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병철 회장은 사람 보는 안목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질문들이 삼성그룹에 입사해서 회사를 흥하게 할지, 망하게 할지를 가리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고 했다. 더욱이 이병철 회장 옆에는 관상 전문가가 있어서, 그 사람의 조언이 절대적이라고 했다.

이병철 회장의 면접 결과 나는 운 좋게도 좋은 결과가 나와 중앙일보 개발부에 근무하게 되어 삼성 사람이 되었다. 1974년 봄부터는 중앙일보사 개발본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본부장은 마산 출신의 조성오 씨로 키가 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는 분이었고, 식물부의 부장은 대구 출신의 최주견 씨였다.

입사하여 두어 달 간은 소공동 중앙일보사에서 근무하다가 그 후로는 동부고속 관광버스를 임차하여 용인군 포곡면 전대리에 만든 임시 사무실로 출퇴근하게 되었다.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서 소공동 중앙일보사 앞에서 통근버스를 타고,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용인인터체인지에서 전대리로 가자니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다 두어 달 쯤 지나서 임업부의 허영회(고려대 임학과 출신)와 나는 전대리에 방을 얻어서 상주하게 되었다.

그때 용인군 포곡면 전대리 일대의 임야와 토지를 매입하여 토목공사가 한창이었고, 계획구역 안에 있는 땅을 그때까지 구입하지 못한 것도 몇 군데가 있었다. 동아일보사에서 몰래 들어와 사진을 촬영해가면서 파헤치는 땅을 고발하기도 했다.

여름 어느 날 한 밤중에 소나기가 퍼부어서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지프차를 타고가는 중에 차가 진흙탕에 빠져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되어 그냥 내버려두고 현장에 있는 현장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안주로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며칠 후 열이 심하고 설사를 했다.

감기나 몸살 정도려니 생각하고 건강한 몸만 믿고 바쁜 일들을 해나갔지만,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서 용인읍내에 나가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보니 별다른 진단이 안 나왔다. 이후에도 계속 버티면서 일하다보니 고열과 설사가 심하여 하는 수 없이 서울 집으로 가서 인근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으나 역시 별다른 진단을 못 내리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니 상황이 더욱 심해져 본사 개발부에 근무하는 동기생 강인회한테 이야기하니까 고려병원으로 가보자고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고려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병원은 삼성그룹의 병원이어서 입원수속은 종이 한 장만 쓰면 되었다. 검사가 끝나자마자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호자의 승낙서가 있어야 수술을 한다는 것이었으나 마침 문병 왔던 동기생들이 서약서를 쓰고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수술 후유증이 생겨 저 세상으로 가지나 않아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경과도 차차 좋아졌으나 수술 부위에서 계속 고름이 나와 퇴원을 오래 끌게 되었다. 병원 측에서는 통원치료를 권했지만, 나는 통원거리가 멀고 집에는 에어컨도 없어서 통원치료는 못 받겠다고 버텼다. 병실에는 다섯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좋으신 분들이어서 병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더욱이 내가 가르치던 상명여고 학생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여름방학 중 과외수업을 하다가 매일 떼거리 문병 와서는 재잘거리다가 가서 더욱 심심하지는 않았다.

▲ OO여대 강사 시절에 4학년 여대생을 데리고 용인자연농원을 답사했다. / 필자는 당시 노총각 교수였다

입원 중에 8.15경축행사에서 문세광이 육 여사를 저격했다는 급보가 들려왔고, 서울지하철 개통식 소식도 있었고, 군사정권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는 소식도 있었다. 중앙일보 개발부 사람들의 면회도 끊이지 않았다. 또한 간호사들도 삼성인이라 하여 대접이 소홀하지 않으니 퇴원하기가 싫었다.

짧은 근무기간이었지만 불철주야 일에 매달인 탓으로 몹시 몸이 쇠약해져 장티푸스에 감염되었는데, 시간이 지체되어 대장에 천공이 생겨 대장의 일부를 잘라내야 하는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근 두 달만에 원기를 회복하고 치료도 완벽하여 퇴원을 하게 되었는데, 퇴원수속도 간단히 처리되었다.

당시에는 의료보험제도가 없었지만 삼성에서는 의료보험보다 더 좋은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즉, 삼성 사원은 같은 그룹 내 고려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입원비의 80%는 회사가 부담하고 20%만 본인이 부담하는 제도인데, 20% 금액도 퇴원 시에 일시불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액수에 따라 몇 개월로 나누어 봉급에서 분납하는 제도였다. 환자에게는 전혀 부담이 가지 않는 훌륭한 제도였다.

이병철 회장은 일생의 마지막 사업으로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 관심이 각별했다. 용인부지에 주택을 한옥으로 짓고 서울 삼성본사로 출퇴근 하면서 퇴근할 때마다 현장 일의 진척 상황을 지켜보았다.

매주 수요일 오후마다 이병철 회장 주재로 회의를 했다. 이병철 회장은 일의 진행과정을 자세히 묻고 지난 주 회의 때 보고한 내용과 조금만 다르면 금세 알아차리고 지적하시는 분이었다. 보고사항을 작은 수첩에 깨알같이 항상 적었다. 이 분의 목소리는 모기소리만큼 작은데다가 경상도 사투리인지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잘못 알아들었으니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겨울철에는 묘포장 조성공사를 하느라 불도저로 정지작업을 하면, 표토(表土)가 30cm 두께로 구들장처럼 일어났다. 어느 한 곳을 정지작업을 하다 보니 고총(古冢)이 나오고 잘 쓴 석관묘 안에는 머리카락 같은 나무의 실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주인 없는 유골이라 북어포와 막걸리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처리했다.

겨우내 토목공사를 마치고 나니 해가 바뀌어 새봄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묘포장 소장에서, 플라워 센터 소장으로 자리를 옮겨 장미원(Rose Garden)을 식재 설계하고 조성부터 해야 했다. 유운리에 있는 양돈사업부에서 거름 먹은 논흙을 옮겨와서 개울바닥에 1m 정도로 성토(盛土)를 한 다음, 구덩이를 파고 식재사업을 했다.

장미원은 ‘HT: Hybrid Tea’, ‘Fl: Floibunda’, ‘Cl:Climber(덩굴장미)’, ‘Mini:Miniature(미니장미)’등 계통별로 식재상(植栽床, Planing bed)를 구분하고, 식재상에는 꽃 빛깔별로 나누어 식재계획을 마쳤다. 최대한의 비배관리를 예상하여 식재거리를 넓게 잡아서 HT계통은 90cm가 표준인데, 120cm로, Floribunda 계통은 60cm가 표준인데 90cm 식재거리를 잡고 구덩이를 팠다. 식재구덩이도 표준규격보다 깊고 넓게 파고 유기질 비료를 듬뿍 넣었다.

덩굴장미는 아치와 기둥에 얹고, 장미원 둘레에는 레이스 장식을 하는 것으로 식재설계를 하여 약 4,500여 주의 장미를 심게 되었다.

장미원 조성과정에서 돌을 골라내거나 장미 구덩이를 파는 일은 동네 아주머니와 처녀들이 동원되어 단기간 내에 일을 마쳤다. 나는 이 소중한 식재도면을 얼마 전까지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