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도 봄에 학장 직무를 마치고 나서, 곧바로 연구년을 신청하여 미국 대학의 초빙교수로 가고자 준비를 하였다.
젊은 날의 유학의 꿈은 깨어졌지만, 초빙교수로 나가서라도 미국의 학문을 접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우리 집 어린 남매의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서였다. 딸은 초등학교 4학년으로 열한 살이었고 아들은 3학년으로 열 살이었는데,. 이때가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시기였다.
미국의 대학 중 원예학과와 조경학과가 모두 있는 대학을 꼽아보았더니, 고넬대, 펜실버니아주립대, 캔사스주립대, 오하이오주립대, 퍼듀대, 버지니아텍(Virginia Tech) 등이 있었다. 이들 대학 중 내가 유학의 꿈을 꾸었던 곳은 코넬대학이어서 나와 같은 전공 교수를 찾아내 편지를 보냈지만, 소식이 없기에 학과장한테 다시 편지를 보냈지만 역시 일자 무소식이었다.
그러던 차에 버지니아텍에서 학위를 받고 생물학과에 새로 부임한 한영환 박사의 말이, 자기가 나온 대학이 원예학과도 유명하고 또한 조경학과는 더욱 유명하다고 한다. 더군다나 버지니아는 경치가 아름답고 기후도 좋고, 우선 안전한 곳이라고 자랑을 하고 더욱이 그곳에는 자기와 친하게 지내던 유학생들이 많이 있어서 그 유학생들이 내가 가도 잘 대우해줄 것이라며 계속 권유해왔다.
나는 이 권유를 받아들여 버지니아텍 조경학과장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금세 답장이 왔다. 버지니아텍의 초빙교수를 환영하며, 연구실, 컴퓨터, 전화기 등의 집기를 제공할뿐더러 강의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IFLA 총괄위원장을 하였고 학장 경력을 써 보낸 것이 높이 평가된 모양이었다. 영어가 짧아 강의는 못하고, 한 학기에 한차례씩 특별강의만 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1993년 8월 하순, 우리 네 식구는 이민용 가방 8개에 짐을 싸들고 김포공항에서 대학원생들의 환송을 받아가며 노스웨스트 비행기를 탔다. 열세시간 만에 미국 디트로이트 국제공항에 내려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버지니아 소도시 로아눅(Roanoke)으로 가는 국내선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두세 시간 정도 남쪽으로 비행을 하였다. 국내선 비행기는 탑승정원이 2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프로펠라 비행기였다.
로아눅은 강원도 원주시의 자매도시였다.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의 장성이 이곳출신이어서 자매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양 도시 간에는 꾸준히 교류를 하고 있다고 한다.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리니 미리 연락된 유학생 세 명이 각자 차를 가지고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생화학 전공의 김철환(현재 미국거주), 교통학 전공의 김창균(현 관동대 교수), 관광학 전공의 차석빈(현 순천향대교수) 등이었다. 우리 네 식구와 이민용 가방 8개와 작은 손가방들을 싣고 블랙스버그(Blacksberg)로 갔다. 집은 이미 예약해놓았고, 전기와 전화도 이미 설치해놓았다. 동네 이름은 폭스로지(Foxlodge),라고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가장 깨끗한 새 동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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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지니아텍 조경학과 교환교수 시절 / 김철환 박사학위 축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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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네 식구가 살 곳은 목조 3층 아파트였는데, 첫날밤에는 짐을 정리하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 보니 이미 밤 12시가 다 되었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나가보니 흑인이 뭐라고 떠들어대는데, 쿵쿵 소리 내며 뛰어서 시끄러워서 잠을 못자겠다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목조 아파트의 바닥은 나무마루여서 작은 발자국 소리도 소란스러웠다. 미국에서의 첫날에, 그것도 한 밤중에 흑인이 나타나서 떠들어대는 바람에 첫날부터 겁을 먹었다.
조경학과 비서에게 도착했다는 전화를 해서 짐정리를 하고 안정이 되면 출근하겠다고 이야기 했더니, 천천히 나와도 좋다라고 하여 우선 살림살이도구부터 장만하기로 하였다. 급한 게 쌀이었다. 한국과는 달리 가까이 구멍가게나 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것들은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가게가 하나 있는데, 흔히들 한국장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가서 쌀이며 채소며 반찬거리를 사다가, 우선 우리를 마중 나와 준 세 사람을 불러서 감사의 표시로 식사를 대접했다.
그다음 급한 것이 자동차였다. 유학생 김철환 씨와 로아눅에 있는 현대 자동차 딜러에게 가서 소나타 2000cc짜리를 1만3천 달러주고 샀다. 차 빛깔은 네이비블루와 새빨간색 두 가지만 있어서 네이비블루로 결정했다. 그들은 네이비블루라고 하지만 우리말로는 군청색, 남색, 쪽빛계통이었다. 등록세는 400달러를 내야했고 자동차보험으로 1,040달러가 들어갔는데, 새 차는 보험료가 비싸서 걱정이었으나 다행히 일시불은 아니고 1년에 세 차례 분납으로 처리했다.
또 급한 것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 J-1비자를 갖고 초등학교엘 찾아가서 입학수속을 밟았다. 한국에서 재학증명서와 성적증명서들을 모두 영문으로 만들어 갔지만 그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만 소아과병원에서 만들어준 건강진단서만 요구하고 여기서 빠진 것만 지정 병원에 가서 보완해오라는 것이었다.
40달러를 주고 주사를 맞은 후에 사인을 받아서 학교에 제출하는 것으로 입학수속은 처리되었다. 교장한테 한국인 학생이 있는 반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무척 섭섭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주 잘 처리한 일이었다. 한국인 학생과 같은 반에 있으면 영어 배우는데 지장이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딸은 4학년이었는데 미국에 와서 5학년이 되었고, 아들은 3학년이었는데 4학년이 되었다.
학교에 보내놓고 숙제하는 것을 도와주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초등학교에서 국어에 해당하는 과목들 ‘Language Art'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국어교과서가 따로 없고 단편소설 같은 책에서 50여 쪽을 읽고서, 주인공은 어디에 갔느냐, 만약에 주인공이 너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문답을 써야했다.
하룻밤 사이에 50여 쪽을 읽고 질문의 답을 찾아내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