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들어 차를 타고 캠퍼스를 지나다보니까 교수를 따라서 학생들이 옯겨 다니며 현장수업을 하는 것이 눈에 띄기에 확인해보니 조경식물학 강의였다. 따라다니면서 동정을 살피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교수와 통성명을 하고 이 과목을 청강하겠다고 했더니, 쾌히 허락해서 청강하게 되었다.
조경식물학 교수는 이름이 니에미에라(Alex X. Niemiera)로, 로아눅대학 식물학과를 나와서, 캔터키주립대학에서 원예학 석사과정, 버지니아텍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조교수로 계신 분인데, 편안한 농부 같은 인상을 주었다.
1주일의 세 시간 중 두 시간은 현장강의를 하고, 한 시간은 실내강의로 이루어졌다. 현장강의는 캠퍼스 구석구석을 돌면서 정해진 식물을 찾아다니면 식물의 특성을 설명하고 지난번 강의한 것을 현장에서 퀴즈로 시험을 보는데, 퀴즈는 식물의 이름과 학명을 적어내는 것이었다.
수강생은 20여명 정도인데, 교수 가까이에 붙어서 녹음을 하는 학생도 있었고, 카메라나 비디오카메라로 식물사진을 찍기도 하고, 또 어떤 학생은 식물의, 가지를 꺾어서 가방에 챙겨 넣기도 한다. 첫 학기는 상록수, 둘째학기는 낙엽수로 나누며 강의를 했다.
2월 어느 날,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에 현장수업이 있었다. 한 시간을 따라다니니까 옷과 신발이 다 젖었고, 몸은 떨리기까지 하였다. 학생들은 우산을 받쳐 들거나 우비를 입고서, 공책에 진눈깨비가 떨어져 종이가 젖어도 열심히 노트를 한다. 더욱이 놀란 것은 ‘그만 합시다’라고 말하는 학생이 없다는 것이었고, 교수도 제 시간을 꼬박 채우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궂은 날씨에 야외에서 계속 강의를 했다가는 난리가 날판인데도 학생들은 불평 한마디 없었다.
내가 가지고 간 조경식물 슬라이드 필름은, 조경학과에서 특강을 이미 했기에 니에미에라 교수에게 주었더니 무척 고마워했다. 필름 중에는 백송(천연기념물 제8호, 헌법재판소 뒤뜰 소재)과 은행나무, 이팝나무 등 미국에서 보기 힘든 진귀한 것도 있었다.
이 교수는 수업시간에 슬라이드 쇼를 하면서 나를 소개하고, 닥터 최가 준 것이라고 소개까지 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끔 식물해설을 코멘트 해주니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놀라기도 했다. 니에미에라 교수 강의를 1년 정도 들으니, 대충 강의내용을 알아들을 만 했다.
학기말 끝 시간에 종이를 돌리는데 나에게는 주질 않기에 나가서 나도 달라고 하니까, 빙그레 웃으면서 주기에 받아보았더니 기말시험문제지였다. 문제지는 모두 3장으로 단답식이었는데, 답은 쓸 만 했다.
시험이 끝날 무렵쯤 교수가 또 다른 종이를 나누어 주는데 또 나만 주질 않아서, 이번에도 나가서 달라고 하여 받아보니 교수평가문항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교수평가제도가 없었던 때여서, 참고자료가 될 것 같아 여러 장을 얻어놓았다.
조경학과장 이름은 밀러(Patrick A.Miller)였다. 독일계 미국인으로 이민 3세였는데, 캘리포니아에 있는 포모나대학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버클리에서 석사학위,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한 사람으로, 점잖게 생겼으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약소한대로, 첫 학기에는 한국의 전통조경식물에서 준비해간 슬라이드 쇼를 하면서 특강을 해주었다.
이 대학의 조경학과는 건축 및 도시대학 소속으로 건축학과, 건설공학과, 도시학과와 함께 네 개학과중 하나였는데, 건축학과와 조경학과는 5년제여서 학과평가 서열이 높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일류학과인 셈이었다. 조경사 과목은 원예학과 교과목이어서 좀 특이했다.
어느 날 대학교수는 모두 잔디밭 광장으로 모이라는 메시지가 왔기에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도서관에 있다가 그 시간에 나가보았더니 총장의 고별사였다. 본인은 건강이 허락하지 못해서 총장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사의를 표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민주화의 열풍이 불어 닥쳐 대학에서도 총장을 교수가 직접 뽑는 선거풍토가 유행하였다. 동국대학에서도 총장선거를 두 번이나 치렀고, 경주캠퍼스에서는 부총장 선거를 세 번이나 치른 경험이 있었다. 총장이나 부총장 선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미국 대학의 총장 선출방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 대학에서는 총장선거를 직접 교수가 투표하는 것이 아니고, <총장초빙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대학이 아닌 외부에서 경영 능력이 있는 저명한 인사를 모셔오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또한 총장의 임기가 우리나라같이 4년으로 못 박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귀국하면 총장선거에 관여하여야만 될 형편이어서, 미국대학의 총장 초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알아보았다.
조경학과 학생들 중에는 이민 1.5세대가 하나 있었는데, 열 살 때 이민을 와서, 우리말은 알아듣기는 하는데 말하는 것이 서툴렀다. 반가워서 식당에 가서 점심도 사주었는데, 다음 학기에는 뉴저지대학 조경학과에 1년간 공부하러 가게 될 예정이라고 하면서, 그 대학에서 수강하고 학점만 제출하면 인정받는다는 것이었다. 동국대학교의 현실과 비교해보았다. 같은 재단 아래 서울과 경주에 캠퍼스가 있지만, 학생이나 학점교류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원 과정에는 대만 출신 유학생으로 여학생이 한명 있었는데, 같은 동양인이라 나를 반가워했고, 그의 어머니는 나와 동갑나기로 한국으로 관광을 가서 눈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대만대학교 농과대학 식물병리학과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내 우편물이 와 있으면 내 연구실에다 갖다 주기도 했고, 건축대학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내가 가면 친절히 잘 도와주어서 고마웠다.
이 대학은 중앙도서관이 있고, 건축, 조경 분야는 별도의 도서관이 있어서 나는 중앙도서관과 건축도서관 양쪽으로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 대학은 120여년 역사를 지닌 오래된 대학으로 엄청난 자료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내가 미처 알지도 못했던 무궁무진한 자료들을 볼수 있어서 한마디로 부러웠고 연구가 저절로 되는 듯했다.
도서관에는 냉난방이 잘되어 여름에는 두 시간이 지나면 추워서 웨디스(구내매점)에 가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여야 할 정도로 너무나 쾌적한 분위기였고, 겨울철에는 외투는 물론이고 윗저고리도 벗어야 할 정도로 난방이 잘 되었다.
이 도서관의 특이한 점은 서가에서 꺼내본 책을 본인이 서가에 다시 꽂는 것이 아니라 책상에 그대로 두고 나가면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알아서 정리하게 하는 제도였다. 그러므로 모든 책들은 항상 번호순서대로 제 자리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