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4화)
  제1장 고향 이야기

금곡초등학교에 입학 한 것을 여덟 살 때였다. 널울(호평동 벌말)에서 금곡까지의 거리가 5km쯤 되는데 걸어서 다녔다.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와 고단해서 깊은 잠을 자면 어머니가 깨우시면서 해가 떴으니 아침 먹고 학교 가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잠결에 일어나서 얼른 밥을 먹고 가방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가면 식구들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아침 해가 아니고 저녁에 지는 해라고 하면서 나를 골려주기도 했다. 그 먼 학교를 걸어 다니기에 힘겨웠고, 흰 양말도 하루만 걸어 다니면 구멍이 뚫리는 게 예사였다.

봄 가을에 소풍을 가는 곳을 금곡릉, 미음나무, 약대울 개울, 그리고 사릉(思陵) 등이었다. 곰곡릉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잠든 곳으로, 학교에서 500m 쭘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이고, 사릉은 단종 비 사릉의 능으로 3km쯤 떨어져 있고, 미음나루는 한강변으로 5km쯤에 있다. 옛날에는 나루터가 있어 번성하였던 곳으로, 동산에는 숲이 우거지고 벼랑 끝은 천길 만길 같은 곳이었다. 경치가 무척 좋았는데, 여기가 이승만 정권 때 현병대장을 지낸 원용덕 장군의 별장이 있던 곳이었다.

4학년 가을 소풍 때에는 금곡에서 6km쯤 떨어진 진접읍 내각리의 봉영사(奉永寺)란 절로 소풍을 갔었다. 봉영사 지붕 나루에 청기와가 덮여 있다고 해서 소풍 길에 오른 것이었다. 봉영사는 신라 26대 진평왕 21년(589)에 창건하여 봉인암이라고 하다가, 조선 21대 영조 13년(1737)황폐해진 절을 중창한 후, 다음 해 선조의 후궁 인비 김 씨의 묘를 순강원(順康圓)으로 승격시키고 영조31년(1775) 절의 이름을 봉영사로 고쳐 부르게 하고 순강원을 보호하는 원찰로 삼았던 절이다. 청기와 구경은 좋았으나 소풍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그만 중간에서 짧은 해는 지고 금세 어두워져서 부모님들이 관솔불(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와 옹이에 불을 붙인 것)을 들고 사릉까지 마중 나왔던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금곡과 널울 사이에는 고개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담안과 새털말 사이에 있는 고개로 서낭당고개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큰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고, 돌무더기 앞에는 얼룩덜룩한 금 줄이 쳐 있었는데, 이른 아침에 지나다보면 종이돈이 금줄에 걸려 있기도 하고, 고사떡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기도 했다. 우리들은 곧잘 그 떡을 맛있게 먹고 종이돈은 집에 가지고 가면 부정 탄다고 해서 가게집에 가지고 가서 사탕을 사먹기도 하였다.

다른 하나 돌팍고개는 좀 큰 고개였다. 가을이 되어 학예회나 운동회 연습으로 어둠이 깔려 늦게 오는 야음에는 개구쟁이들이 먼저 고개마루 언덕 위에 올라가 숨었다가 애들이 지나가면 흙을 끼얹기도 했다. 처음에는 호랑이가 나타난 줄 알고 무척 무서워하기도 했었다.

이 돌팍고개에서 앙골로 내려가는 비탈길에는 큰 바위들이 놓여 있었는데, 먼저 뛰어간 애들이 바위 뒤에 숨었다가 뒤에 오는 애들을 깜짝 놀래주기도 했었고, 비탈길에는 끄령이 많이 자라서 두 포기를 한데 묶어 놓으면, 뛰어 내려오는 아이들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양골길 논두렁에는 좀 넓은 풀밭이 있는데, 여기는 씨름터가 되었다. 6학년 때 집으로 가는 길에 여기서 씨름을 하다가 반장을 하던 유승국의 왼팔 뼈가 튀어나와서 금곡에 하나밖에 없던 의원으로 업고 뛰어가던 일도 있었다.
 
▲ 금곡초등학교 제32회 졸업기념사진 (1954. 3.20.) / 뒷줄 오른쪽 끝이 필자

담안 큰길가에는 옹달샘에 하나 있었는데, 놀면서 가다가 샘이 다가오면 먼저 뛰어가 줄을 섰다가 차례대로 엎드려 샘물을 마시곤 했다. 갑자기 뛰어와 엎드려 샘물을 들어마시자면 사래가 들려 재채기를 하였다. 가을에는 풀줄기를 짤라서 빨대를 만들어서 물을 빨아먹는 방법도 터득했었다. 이것이 요즘 말로 흔히 쓰이는 스트로(straw)인 셈이다.
 
주머니에는 언제나 칼을 갖고 다녔는데, 이는 무기가 아니라 유용한 도구였다. 연필 깎는 데 쓰는 것은 물론이지만, 길가 밭에서 무를 뽑아 깎아먹는데도 쓰이고, 가을 이면 밤을 주워 껍질 깎아 먹는데도 쓰이고, 봄이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피리를 만드는데도 쓰였다.

가을, 겨울철에는 주머니에 성냥이 필수품이었다. 가을에는 밭에서 콩포기를 뽑아다가 불 위에 놀려놓고 구워먹고, 겨울철에는 오가면서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태우고 손발을 녹이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때의 칼이라고는 양철집에다가 무쇠조각을 끼운 것으로 조잡한 것이었지만, 소중한 물건이었다. 주머니에는 또한 딱지와 구슬도 한웅큼 씩 갖고 다녔다.

널울에 살고 있던 우리 반 애들은 10여 명쯤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반 애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불러다가 흰쌀밥도 먹여주고 같이 놀게 하였는데, 지금도 친구들을 그때 일을 종종 이야기 한다. 우리 집은 일년 열두 달 쌀 걱정은 하지 않을 정도여서, 그래도 좀 잘 산다는 편에 들었다.

널울에서 제일 잘 살던 친구는 정승집 아들이라고 부르는 이규형이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형 이화(李和)의 자손으로, 지금도 널울 울터골에는 이화의 사당이 있다. 정승집 외아들이라 곱게 자라, 널울 친구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양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고 다녔으며, 광문전과와 수련장을 매 학기바다 갖고 있었다. 마음이 여려 친구들이 놀려주면 눈물을 시도 때도 없이 흘리는 게 한 가지 흠이었다.
 
대동상고를 나와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낙농업을 크게 했었는데, 결혼도 늦게 하더니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형제를 두고 불혹(不惑)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나와는 무척 친하게 지냈는데, 섭섭하고 허전하기 그지없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동창은 50여명이 되는데, 그 중 대학을 졸업한 친구는 모두 네 명으로 그 중 여자가 한 명이었다. 이장근은 나와 같이 청량중학교에 입학하여 휘문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준재였다. 고향 처녀와 연애결혼하여 신혼초부터 한국일보 충주 주재기자로 근무하다가 퇴직해서, 아직도 충주에서 아들형제와 네 식구가 살고 있다. 자기는 충주사람이 되었고, 죽어서도 충주에 묻힐 거라고 한다.

또 한 친구는 앞 서 이야기 한 정승집 아들 이규형이고, 여자 하나는 조원숙으로 정신여중고와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왔다. 에쁘고 성질도 곱고 또한 부모님들도 아주 점잖으신 분들로, 금곡에서 가장 큰 상점을 해서 우리반 친구들 중에서는 돈 걱정이라는 것을 몰랐고, 저금도 제일 많이 하는 애였다.

대학 졸업 후 아나운서로 방송국에서 근무하다가 해병대 선배장교와 결혼을 하였다 내가 진해 해병학교 피교육자일 때에 그 선배장교는 보급교관을 하였는데,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했었지만 한 번도 가보질 못했었다. 몇 해가 지나 월남에서 귀국해서 다시 진해 교육기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쑥스러워서 방문을 못했다.   

 
  내가 살던 고향집 (3화)
  내가 만난 6.25 (5화)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