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의 주요 문화유산 (85화)
  제11장 [부록] 칼럼2

가운리 고인돌 전시장 
 
남양주 고인돌이 가운리, 삼패리, 지금리, 금남리, 진중리 등 다섯 군데에서 발견되었으나, 거의 훼손되거나 수중으로 묻히게 되었다. 

그 중에서 교통이 편리하고 접근이 용이한 곳은 가운리에 남아 있는 고인돌이다. 남방식 고인돌 1기로, 야산의 과수원 언덕에 누워 있다.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고인돌이 나왔었지만, 나는 그 뜻도 모른 채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더욱이 우리고장에도 고인돌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접근도로를 개설하고 고인돌 주변의 토지를 구입하여 고인돌 전시장을 마련,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석실 서원

옛 양주에는 서원이 도봉서원(현재 서울 도봉동, 조광조, 송시열, 배항, 1573년  창건, 1871년 철거, 1972년 복원)과 석실서원 두개가 있었다. 도봉서원은 양주 땅에서 서울로 편입되었으며, 현재 남양주에 유일한 석실서원이 있다. 

석실서원은 수석동 한강변 옛 미움나루 부근 산언덕 한강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숲속에 자리 잡았는데, 효종 7년(1656) 지방 유림들의 뜻을 모아 창건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원 중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김상용, 김상헌의 두 분만 배향하였다가 숙종 21년(1697)에는 김수항, 이정중, 이단상 세 분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이 세분은 모두가 양주인으로 덕행이 뛰어난 것이 배향을 청한 사유가 된다. 숙종 36년(1710)에는 김수항의 차자 김이안 등이 배향되었고, 연이어 김창집, 김조순 등이 추가로 배향되어 모두 11분이 배향되었다. 

석실 서원은 양주일대를 비롯한 경기일원에서 유림들의 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선현을 배향하는 지방의 중등교육을 담당하였다. 고종 5년(1868)에는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에 의하여 완전히 철폐되어 오늘날에는 빈터만 남아있다. 석실서원 터는 1998년 서일대 강경 향토문화연구소와 남양주문화원에서 지표조사를 마친바 있는데, 토지를 구매하여 석실 서원을 복원하는 것이 좋겠다. 
 
▲ 남양주의 석실서원 흔적

평구역 복원과 관동별곡 시비 건립

삼패리에 있는 평구역 터는 조선 때 평구역이 있고, 찰방이 있어서 11개역을 관할하는 큰 역이었다. 평구역은 한양 옛 중량포(천), 아차산, 석실, 평구, 두미, 봉안, 용진나루, 계월, 양근을 지나 호천을 거쳐 강릉으로 연결되는 육로의 위치하였다. 지금의 경강(서울~강릉 간) 국도의 옛길이 된다. 

평구역에서는 말을 관리하였는데, 일패, 이패, 삼패, 사패가 있어 각각 마을을 이루며 살아서, 지금도 일패리, 이패리, 삼패리의 마을이 있게 되었다. 평구역은 녹양, 안기, 양문, 봉안, 오민, 쌍수, 전곡, 맥동, 구곡, 김천, 연동 등 11개 역을 관할하는 큰 역이었다. 지금도 평구역이 있었던 마을을 역말(마을)이라고 부른다. 

정철의 <관동별곡> 서사 부분에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은 어디메요 치악이 여기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평구역은 우리 고장 삼패리에 있는 평구역을 가리킨다. 

<관동별곡>은 정철이 45세 되던 해 정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한양에서 남양주의 평구역, 양평의 흑수, 여주의 섬강, 원주, 동주, 회양, 금강산, 통진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 등을 읊은 작품이다. 

문장의 분위기가 명쾌하고 활달하여 낭만적인 서정이 넘쳐흐른다. 정철의 <광동별곡> 중 평구역이 나오는 서사 부분을 시비에 담아서 가려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 평구역터 부근에 새로운 전철역이 생긴다고 하니 이름을 평구역으로 정하고, 아울러 <관동별곡> 시비를 세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김삿갓 시비공원

김삿갓은 순조 7년(1807)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한 조선시대의 방랑시인이다. 본명은 김병연으로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辜)이다. 1911년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적되어 당시 6세였던 그는 형 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거기서 공부하여 성장하였다. 

뒤에 사면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폐족자에 대한 천대가 심하고 벼슬길도 막혀, 20세 무렵부터는 전국을 방랑하기 시작하여 도처에 즉흥시를 남겼다. 

그의 시에는 권력자와 가진 자를 풍자하고 가진자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이 많으며, 그중 뛰어난 것도 많아 민중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방랑 중에 아들로부터 수차례 귀가를 권유받았지만, 방랑을 계속하다가 전남 화순 동복 마을에서 객사하였으며 그의 무덤은 최근에 영월에서 발견되었다. 

출생지가 양주이지만, 정확히 어디라고는 분명치 않다. 양주는 현재 남양주와 분리되어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지만 김삿갓은 안동 김씨이고, 그 중에서도 장동 김씨로 분류되는 명문귀족 출신이다. 

우리 고장에서도 김삿갓 출생지에 대하여 연구하여볼 필요가 있고, 또한 우리 고장에 안동 김 씨의 종산이 있는 만큼, 여기에 김삿갓 시비공원을 세워봄직도 하다. 와부읍 덕소5리 석실마을에는 안동김씨의 분산이 있다. 

임꺽정 공원

임꺽정은 조선 중엽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양반의 멸시 속에서 자라났고, 성장해서는 양반에 대한 불평등에 대해서 저항하고 고약하게 치부한 양반집이나 벼슬아치들의 집들을 도둑질하여 가난한 집에 나누기도 하였다. 경기도 황해도 일대서 활약하다가 명종 17년(1562)에 남지근에게 피살되었다. 

현존했던 인물로서 양주에서 출생하였다고는 하나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불분명하다. 임꺽정 졸개들의 일부가 천마산 줄기이며, 강원도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험준한 마치고개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려봄 직도하다. 

남양주의 3대 인물로 임꺽정, 김삿갓, 정약용이 있는데, 남양주의 역사적 인물로 부각시켜볼 필요가 있다. 

한(대)이산봉수

봉화대 터가 진접읍 연평리와 양지리를 나누는 산마루에 있다. 함경도 지역에서 봉수를 받아 포천의 영평, 독산, 우제를 거쳐 한이산에서 받아, 봉화산(서울 목동)을 거쳐 목멱산(남산)으로 이어진다. 김정호가 순조 34년(1834)에 제작한 <청구도>에 한이산봉수가 표시되어 있었으나, 정확한 지점은 지난 해에 토지공사 발굴 팀에 의해서 확인된 바 있다. 

봉수제도는 고려 중엽부터 제도화된 것으로 조선시대에 말기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봉수의 노선은 전국을 거미줄 모양으로 연결하여 전국 673개소가 있었고, 현재의 행정구역 남양주에는 한이산(또는 대이산) 봉수가 유일한 것이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를 의미하며, 횃불(봉)은 야간에, 연기(수)는 낮에 피워 통신하는 방법이었다. 횃불은 5개로, 1개는 평시, 2개는 적의 출현, 3개는 적의 국경 접근, 4개는 적의 국경 침입, 5개는 적과의 접선을 나타낸다. 

우리 고장의 유일한 봉수대 위치가 확인된 만큼 복원하여야 할 것이다. 

맺는말 

1960년대까지만 해도 벽촌이었던 우리 고장이 수도권 인구 밀집으로 인하여 아파트화 된 도시로 변하고 인구 과밀도시에 이르기까지 되었다. 자연히 손상되는 것은 환경파괴이자 문화재 훼손이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의 도시화를 막고 쾌적한 도시로 바꾸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우리 고장에 묻혀 있는 유적들을 발굴, 복원하여 역사문화의 도시로 가꾸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풍양신문, 2001. 1.1.)  

 
  조경용어 _ 관동별곡 (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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