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해서 진해에 근무한지 서너 달쯤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청량리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그 결과가 안 좋아 중앙대학교 부속 퇴계로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문병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위독하시다는 전보가 와서 급히 상경하여 병원으로 가보니 이미 운명하시어 집으로 운구한 상태였다. 46세의 젊은 나이에 고생만 하시다가 칠남매를 남겨놓고 저 세상으로 떠나신 것이었다. 칠남매의 장남으로 세상이 암담했다. 제대하면 미국유학을 하료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군사영어학교 교육 공문이 왔기에, 즉시 연대장 우순제 대령을 찾아뵈었다. 나는 대학원 재학 중에 입대하였고, 제대하면 미국으로 유학 갈 생각이어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쾌히 승낙하시면서 해병학교 교장에게 전화까지 하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시어 정말 고마웠다.
이렇게 해서 나는 10월부터 석달간 해병학교 군사영어반에 입교하게 되어 처음으로BOQ 생활을 하게 되었다. 후보생 시절이나 기초반 교육 때 BOQ 행선지 표시를 한 출퇴근용 해병버스를 보아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BOQ의 뜻을 몰랐다. BOQ는 bachelor officers' quarters 의 약자로서 독신자 장교숙소를 의미한다.
10월 4일 진해교육기지 사령부 해병학교 제6기 영어장교반 과정에 입교하여, 교육기간 12주간은 영어회화 공부만 하게 되었다. 영어 LAB(Lloyd Aereo Boliviano의 약자, 실습실)은 11명 정원으로 짜여져 책상이 11개였고, 수화기와 송화기가 교관과 직접 통화되도록 유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실내는 완전 방음 시설이 되어 있다.
입교한 11명 중 선배 장교는 두 분으로, 해병학교 33기 이홍길 대위와 조정구 대위가 있었고, 다음이 35기로 내가 있고, 후배장교는 37기 강세중 소위, 38기 이의연 소위, 40기 안병순 소위와 해사 21기 조원 소위 등이 있었다.
학습교재는 미 공군 교육사령부 방어언어 연구소 감독 하에 미 공군 언어학교에 의해서 개발된 것으로, 1961년에 발간된 <American Language Course Volume> 1400초급과정과 2100, 2200, 2300, 2400이었다. 오전에는 교재를 읽으며 해석하고 이해한 다음, 오후 네 시간은 테이프를 듣고 질문에 답하고, 따라서 읽기와 말하기 등을 반복 연습하였다.
해병버스로 출근해서 8시에 수업을 시작하고 오후 5시에는 수업 끝이었다. 퇴근 후에는 BOQ에서 영외 거주하니까 완전히 사생활이었다. 하정복은 기초반 교육과정 때 입어보았지만 동정복과 동정모는 임관한 후 처음 입어보고 써보는 것이었다. 작업복이나 위장복만 입고 훈련, 작전, 전투를 해오다가 동정복에다가 넥타이를 내고 생활하게 되니까 신사가 된 기분이고 봉급을 받아가면서 영어공부를 하게 되니 신선놀음이었다.
제대하면 유학을 갈 결심이어서 영어회화 공부는 열심히 하였고, 주말이 되면 마산이나 부산으로 나가서 바깥바람을 쐬고 기분을 전환시키기도 했다. 해병대 군 생활 중에서 가장 편안한 시기였다.
영어장교반 피교육자들은 교관 김사문 소령(해병학교 14기)과 현기대 대위(해병학교 28기)를 모시고 시내에 나가서 가끔 회식도 했다. 김사문 소령은 오랜 교관생활을 해서 농담도 잘 하고 유머가 풍부한 분으로 기수에 비해 계급은 낮아 만년소령이었다. BOQ는 진해 봉황산 밑에 있는 2층 건물로 한 방에서 2명씩 사용하였다.
진해는 겨울이 되어도 땅이 얼지 않고, 눈이 내려도 높은 봉우리에만 흰눈이 덮이고 시내 땅바닥에는 겨울철 내내 눈이 쌓이는 일은 없이 다만 눈발이 땅에 떨어지면서 녹아보리는 정도였다. 진해는 군사도시이고 군항도시여서 일찍부터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아 시민들은 유순하고 음식도 깔끔하였다. 해병대 장교에게는 군사도시 답게 음식점, 다방, 여관 어느 곳에서나 외상이 가능했고, 다만 극장에서만 현금을 받아 총각 장교들이 생활하기에는 편리한 곳이었다.
교육기간 12주는 어느새 가버리고, 12월 28일 수료식을 마치고 곧바로 연말연시가 닥쳐서 1월 8일까지 열흘간의 보상휴가가 주어졌다. 임관 후 처음 가져보는 휴가인데다가 설날이 끼어 있어서 고향 집에 가서 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휴가를 마치고 진해로 내려와 보니, 나는 해병훈련소 인사 병과분류장교로 발령이 나 있었다. 의외의 인사여서 나중에 알아보니, 해병훈련소 초도순시하는 과정에서 지적사항으로 편제상 T/O(Table of Organization)에는 인사장교에 병과분류장교에 포함되어 있지만, 훈련소 개설이래 T/O대로 운영을 안 하고 공석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해에 인사장교의 비리가 문제되어 전출시키는 일까지 있었던 차였는데, 마침 해병학교 영어장교반 수료자 중에서 32기 장교 두 사람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뿐더러 계급이 대위였기 때문에 제외시키고, 그 다음 선임자가 중위계급으로 내가 적임자가 되어 발령받게 된 것이다. 해병훈련소가 생긴 이래 병과분류장교를 최초로 운용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영광스럽게도 내가 발령받는 행운을 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