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부터 꿈꾸어오던 소원이 20여년이 지난 불혹(不惑)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980년 8월 13일 부로 상지대학교 병설전문대학 조경학과 조교수로 발령받게 된 것이다. 상지대학은 원주시내에 있다가 재단이 바뀌면서 우산동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큰 건물들을 짓고 약진을 하던 때였고, 또한 조경과가 신설되어 1학기부터 강사로 출강하여 강의를 하였던 터였다.
학장은 법학과의 박재우 교수였는데, 서울시립대 동문이어서 잘 대해주셨고, 행정학과의 원로교수이신 양석호 교수님은 해병학교 8기생으로 해병대 선배장교로서 무척 반갑게 대해주셨다. 교육학을 담당하는 함종한 교수는 원주 토박이로 대학원 석사과정을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었다. 또한 축산학과의 김상균 교수님은 대학의 선배님이셨다. 이렇듯 원로교수님 중 인연이 분들이 많아서 나를 아껴주셨고, 또한 교수님들도 많지 않아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교수가 되니 기쁜 마음이어서 의욕적으로 강의도 하고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으며, 특히 외지 학생들이 대부분인지라 저녁이 되면 자취방들을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학생들도 객지생활이라 서먹하던 차에 교수님이 자취방을 방문해주면 무척 반갑게 맞이해주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다.
전문대학에서는 7개학과에 교수가 7명으로 학과마다 교수가 한 분이고보니 모두가 학과장이었다. 교수들이 적어 한 식구나 다름없었고, 점심이나 저녁식사도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경과 학생 중에 청평에 사는 남궁진은 제대군인으로 나이든 학생이었다. 이 학생을 불러다 지시하기를 여름방학 때 각 학과 대표학생들을 청평으로 불러다가 물놀이도 시켜주고 민물고기도 잡아서 천렵놀이도 하면서 친구들을 사귀어, 가을에 총학생회장 출마를 준비하라고 시켰더니, 과연 방학 중 그대로 잘 진행하였다.
학생회장 선거는 직접 선거가 아니고 과대표들만이 투표하는 간접선거 방식이어서 선거에는 쉽게 당선이 되었다. 축제기간 중에는 사촌누나 남궁옥분을 불러와서 축제분위기를 한껏 돋우어주기도 했다. 체육대회 때에는 학생회장이 개회사를 하는데, 연설을 못해서 나까지도 무척 당황한 적이 있었다. 미리 연설문 원고를 써서 낭독하도록 준비시켰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깊은 가을에 졸업반 학생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오대산 지역으로 월정사와 소금강 코스로 2박3일을 잡았었다. 오전 일찍 원주에서 출발하여 월정사를 구경하고, 걸어서 상원사까지 가서 사찰과 국보 제36호인 범종을 감상하고 비로봉을 향하여 올라가던 중, 앞에 가던 한 여학생이 감나무가 있다고 소리치며 혼자 뛰어갔다.
나는 깊은 산 속에 무슨 감나무가 있겠냐 싶어 반신반의하면서 따라가 보니, 흡사 감나무였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까 감나무는 아니고 마가목(Sorbus commixta) 이었다. 잎은 다 떨어지고 마가목 열매만 주렁주렁 달린 것이 감나무와 흡사했다. 마가목 열매는 한 개가 5~8mm 정도로 콩알만 하지만, 이 작은 열매가 덩어리로 달려서 크기는 감만하고 빛깔도 감 빛깔과 똑같았다.
점심 때가 지나서 배가 고프던 차에 멀리서 본 마가목 열매를 감으로 착각하고 반가워서 따먹으려고 뛰어갔던 것이다. 오대산(1563m) 정상에 올라 만추(晩秋)의 풍경을 만끽하고 하산하여 민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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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백산 주목나무 옆에서 / 주목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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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을 다니다보면, 대개 낮에는 건성으로 구경하고 밤에 더 즐기는 게 예사다. 내일의 산행을 위해서, 그리고 가을해는 짧아 쉽게 넘어간다고 일찍 자라고 일렀건만, 밤늦게 잠들다보니 자연 늦게 일어나게 되어 아침밥을 늦게서야 지어먹고 출발하니 10시가 넘었다. 이날은 노인본(1338m)을 넘어 소금강으로 가야했다.
월정사 입구에서 노인봉으로 가는 길은 길고도 지루했다. 오전까지는 괜찮던 날씨가 오후가 되어 높은 산에 올라보니 보슬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어 긴 행렬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산마루에는 조릿대(Sasa borealis)가 사람 높이만큼 무성히 자라 시야는 더욱 좁아졌고, 산마루를 넘으니 어두워져서 길은 츶을 길이 없고 바위 절벽이어서 매우 위험하였다.
내려가는 길을 가팔라 계곡으로 찾아드니, 산길이 그제서야 나타났다. 큰 바위 밑에 얕은 동굴이 있어서 비도 피할 겸 노숙을 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래도 하산을 해야 했다. 너무 캄캄해서 길을 분간조차 하기 어려워 수건을 꺼내서 버너용 석유를 묻혀서 솜방망이 불을 만들어 길을 비추어가면서 하산을 하여 마침내 마을에까지 내려오니 한밤중이 되었다.
민박을 하고 그 다음날 하산했던 길을 찾아올라가 보았더니, 개울을 따로 있는 높은 벼랑길은 실수로 한 발짝만 헛디뎠어도 수십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깊은 개울물에 빠질 절벽이어서 아주 아찔하였다. 지난 밤의 하산 길은 정말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고 생각되었다.
여름방학 때는 학생들과 태백산 답사를 떠났다. 기차를 타고 원주에서 태백으로 갔다. 전에는 중앙선이 원주, 제천, 영주를 거쳐 봉화, 도계를 지나 강릉으로 연결되었는데, 요새는 제천에서 갈라져 영월, 신동, 사북, 고한을 지나 태백으로 이어지는 길이 생겼다. 태백으로 가는 중간에 전국의 철도역 중 가장 높다는 추천역(해발 950m)을 지나갔다.
태백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소도로 갔다. 소도는 한문으로 쓰이는 이름이고, 원래 순수한 우리말로 솟대(삼한 때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스러운 곳)인 것으로 생각된다. 소도에서 짐을 지고 청원사까지 걸어가서 민박을 정하고 짐을 풀었다. 청원사는 오래된 절은 아니고 새로 지은 자그마한 절이었다. 청원사 앞에 있는 못은 물이 연중 마르지 않아서 겨울에도 넘쳐 흐르고,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한다.
샘에서 흘러 나오는 물에 발을 담그니 10초도 못 견딜 만큼 얼음물같이 차가워서, 세수만 하여도 몸의 열기가 싹 가셨다. 어느 집 돌담 안에 잘 생긴 만병초(萬病草, Rhododendron brachycarpum)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기에 주인 할머니에게 여쭈어보았더니, 나물 캐러 태백산에 갔다가 작은 것을 캐다 심은 것이 이렇게 크게 잘 자랐다고 말씀하신다. 탐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꽃나무였다.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백두대간의 중추이고 우리나라의 영산인 태백산(1568m)에 올랐다. 태백산 정상에는 돌로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단(天帝壇)이 있고, 그 가운데는 높은 자연석에 글씨를 새긴 한배검 비석이 있었다.
산 정상 부근에는 주목(朱木, Taxus cuspidata)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고산지대의 산마루여서 그런지 키는 크지 않았지만 굵기는 아름드리였고, 빛깔은 진분홍색으로 아름다웠다. 주목은 천년을 살고, 죽어서도 썩지 않고 천년을 사는 나무라, 모진 풍상에도 잘 버티며 자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