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북한강지구전투 41주년을 맞이하여 (72화)
  제10장 [부록] 칼럼1

남양군청에서 덕소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50m쯤 가게 되면, 높다란 흰 기념비가 푸른 숲속에 가려 약간의 모습만 내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까이 가서 비문을 읽어보면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海兵隊 北漢江地區 戰捷碑)라고 쓰여져 있다. 

흔히 차를 타고 무심코 지나쳐버릴 뿐 가까이 가서 읽어보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며,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그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분으로 50세 정도 된 분들만이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그러한 분들도 극히 적은 숫자다. 그래서 이 전첩비의 역사적인 사실을 널리 알리고, 또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기리고자 이 글을 쓰게 된다. 

때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이 군사분계선인 38도선을 넘어 남침하기 시작하여 서울, 대전, 구미까지 속속 무너져가고 경주와 대구, 마산을 끼고 있는 형산강과 낙동강에서 겨우 방어선을 구축할 무렵,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유엔군이 9월 28일에는 3개월 만에 수도 서울을 탈환하게 되었다. 

서울을 빼앗긴 인민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려고 작전을 시도함에 따라 의정부 방면에는 미 해병 1개 연대가, 남양주 지역에는 대한해병대 1개연대가, 광주지역에는 미 육군 보병7사단이 각각 작전지역을 배당받고 소탕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특히 남양주 지역은 적의 최정예 연대급부대가 완강히 방어작전을 펴고 있던 곳으로, 대한해병대 보병 3개대대가 공격작전을 펴서 인민군을 완전 섬멸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었다. 

신현준 해병대령이 지휘하는 연대급의 2대대(대대장 김종기, 해병소령)와 5대대(대대장 김대식, 해병중령)는 10월 1일 작전명령을 받은 후 지휘본부를 망우리에 설치하였다. 

10월 2일 10시, 5대대는 좌일선인 구리시의 인창리를, 2대대는 우일선의 교문리를 공격개시선(LOD)으로 하여 일제 공격하여 개활지를 통과하던 중 2대대는 도농리 남방의 OO고지에서 적과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5대대의 박격포 지원사격과 엄호사격으로 OO고지를 점령하고 차례로 야산을 공격해가면서 마지막으로 버티는 적들을 완전 섬멸하기에 이르렀다. 

패주한 적은 165고지(진관)와 113고지(지금)에 집결하여 재공격을 시도하였으나 5대대의 집중포격으로 섬멸 당했다. 2대대는 가운리와 마산(이패리)을 점령하였으며, 5대대는 10월 3일 12시 30분 금곡을 점령하였고, 금곡북방 700m 지점인 돌팍고개에 방어망을 구축한 적진지를 파괴하고 지뢰를 제거한 후, 10월 4일 12시에는 마석을 점령하고 17시에는 븍한강변인 대성리까지 진출하였다. 

해병 제1대대(대대장 고길훈, 해병소령)는 미 육군 7사단에 배속되어 10월 2일 09시에 이태원을 공격개시선으로 작전을 시작, 15시에는 덕소를 점령하고 17시에는 족자섬 일대와 북한강 지역 조안면의 송촌리까지 진출하였으나 큰 접전 없이 포로 27명을 생포하여 후송하였다. 
 
이 북한강지구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지역을 현재 전첩비가 세워진 산의 정상으로, 적 사살 2백여 명, 포로가 50면이었고, 아군도 전사 16명, 부상 63명의 피해를 보게 되었던 곳이다. 
 
▲ 해병대 북한강지구전첩비 제막식날(1987. 12.10.) 해병대 의장대원들과

10월 5일 작전을 완수하고 인창리에 설치했던 지휘본부에 직결한 후 6일 90대에 분승하여 출발, 7일에는 인천에 집결하였다. 이로써 경인지구 작전을 최종 마무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석 달간의 인민군 치하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필자의 나이는 10살이었다. 그 당시에는 다만 국군이 진군하여 온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성장해서 알아보니 이 전투를 치른 부대가 대한민국 해병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해병대만이 최강부대이며 오직 해병대만이 북진통일을 할수 있는 군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6.25가 터지고 얼마 안 되어서 일이다. 밤마다 인민군들이 회의를 한다기에 호기심으로 부친을 따라가서 멍석 마당에 앉아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내무서원이 따발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총부리를 마을사람들에게 향하게 하고는, 의용군에 지원하지 않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총부리 앞에 감히 나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모두 쥐 죽은 듯이 앉아 있으니까, 결국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자연적으로 지원병이 되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지원병이 된 마을사람들은 필자의 부친을 포함해서 모두 밤중에 금곡내무서로 끌려가게 되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부친은 돌팍고개까지 따라가다가 야음에 숲속으로 도망쳐서 3개월간 천마산의 토굴 속에서 피신을 하게 되었는데, 밤이면 밤마다 따발총을 든 내무서원과 동네 빨갱이들이 찾아와서 조부의 목에다 칼을 대고 아들 숨은 곳을 밝히라고 윽박지르기를 석 달간이나 하였던 것이다. 

어린 필자로서는 겁도 났지만 증오심이 생겨, 후에 성장하면 원수를 갚겠다고 이때 맹세를 했었다. 석 달 만에 국군이 진군함으로써 필자의 부친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결국 부친의 생명은 대한민국 해병대가 구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늘상 해병대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가 대학을 졸업하고는 필자도 해병장교로 지원하게 되었고, 고된 해병장교의 훈련과 교육을 마치고 임관하여 소총소대장이 되어 월남 참전 등으로 해병의 몫을 단단히 하면서, 26세에서 31세까지 만 5년 1개월 간의 꽃다운 청춘을 해병대에 마친 후 예편하게 되었다. 북한강 지구 41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전투에서 산화한 해병의 넋을 기리면서 이 글을 마친다. 

구리시, 미금시, 남양주군 등의 행정기관에서는 해마디 이때를 기념하여 기념행사를 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된다. 

(풍양신문, 1991. 10.3.)  
 
해병대 북한강지구 전첩비(海兵隊 北漢江地區 戰捷碑) 초석에 새긴 글

해병대가 수행한 9.28수도탈환은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고 겨레의 멍레를 벗기고 역사의 광휘를 회복하였으며, 나아가 낙동강 전선 총반격의 기연을 지어냈으니 이 어찌 보천육일의 위훈이 아니리오.

해병은 진정한 조국의 주석이요 삼군의 정병이었노라. 1950년 10월 1일부터 7일까지 해병대는 북한강지구 처단작전을 전격적으로 수행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로써 경인작전의 최종목적을 달성하였도다.

이 전투에서 박찬 감격과 보람을 안고 푸른 하늘아래 고이 잠든 전몰해병이여, 그대들이 영웅무쌍한 이름은 천추 만대에 길이 빛날지어다.  
 
1958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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