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맞이하여 통일기원 봉화불을 올리자 (83화)
  제11장 [부록] 칼럼2

머리말

이달 15일은 해방을 맞은 지 54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방된 지 채 5년이 안 되어 6.25전쟁을 겪은 이후 우리 조국강산이 반 동강이 난 지 어언 48년이 되었다. 민족의 아픔이요, 국가적인 수치이다. 지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국가로는 오직 우리나라뿐이기 때문이다. 

요새 몇 년 전부터 어느 단체에서 8.15맞이 전국 봉화불 이어달리기 행사를 해마다 거듭해오고 있다. 우리 고장에도 봉화대 유적이 문헌상 남아 있지만, 어느 곳인지 정확한 발굴조사가 없어서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 고장도 통일을 바라는 뜻으로, 또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의미로서 봉화(烽火)에 대해서 알아보자.

봉수

봉수(烽燧)는 횃불[烽]과 연기[燧]로 구성되었다. ‘봉’은 야간에 횃불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는 형태이고, ‘수’는 낮에 연기를 올려 통신을 하는 형태이다. 

봉수는 대략 수십 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요지가 되는 산봉우리나 산마루에 연대(烟臺), 즉 봉수대를 두고 낮에는 횃불을 올리고 밤에는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는 날에는 봉수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게 돼, 봉수군이 직접 차례대로 빨리 달려 보고하도록 하셨다. 봉수는 흔히 봉화(烽火)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봉수의 시작은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당(唐)나라에 와서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A.D. 42년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 때 이미 봉화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봉수가 제도화 된 것은 고려 중엽으로, 당시에는 4개의 횃불로 상황을 전달하였고, 조선 세종 원년(1419)에 이르러 5개의 횃불을 사용하는 봉수제도가 확립되었다. 

봉수의 종류와 노선

노선봉수에는 3종류가 있었다. 즉, 경봉수(京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이다. 경봉수는 서울 멱목산에 있는 봉수이며, 연변봉수는 전국 국경 변방에 설치한 것으로 연대(烟臺)라고도 부른다. 통신의 역할 이외에 국경의 수비대나 초소의 역할도 하였다.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의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 봉수로서 전국에 673개소가 되었다. 

봉수의 노선은 거미줄 모양으로 전국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기점은 모두 국경으로 두만강, 압록강과 영남, 호남의 해안 등으로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으로 연결되어 있다. 

직봉은 5개 노선으로 1) 동북은 함경도 경흥, 2) 동남은 영남의 동래, 3) 서북쪽은 내륙으로 관서지방의 강계와 4) 관서의 해안으로 의주, 5)서남쪽은 호남의 순천이었다. 그밖에 간봉이라는 보조선이 있어서 본봉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인 것도 있고, 국경초소에서 본진(本鎭)이나 본읍(本邑)에 보고하는 단거리인 것도 있었다. 

제1노선은 우리 고장을 지나게 되는데, 목멱산 봉화대에서 아차산 봉화대와 남양주, 풍양, 대이산(大伊山) 봉화대를 거쳐 포천, 철원, 안변, 연흥, 함평, 길주, 경성, 회령, 경흥으로 이어지는데 직봉이 122, 간봉이 58곳에 있었다. 

제1노선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목멱산←양주(현 서울):아차산←양주(현 남양주):한이산(汗伊山, 大伊山)←(포천)잉읍재←독산←영평(현포천):미로곡(여로곡)←(철원)적골산 할미현(고모현)←소이산←(평강):토수←송고개←{화양):진천←쌍령←병풍산←성북←소산←봉도치 (안변):철령←사고개←산성←사동←(안변, 4)←(덕원, 2)←(문천,1)←(고원, 2)←(영흥, 1)←(정평, 2)←(함흥, 4)←(홍원, 1)←(북청, 4)←(이원, 3)←(단천, 4)←(명천, 8)←(경성, 8)←(회령, 5)←(회령, 11)←(종성, 1)←(은성, 10)←(경원, 10)←(경흥, 8)

봉수의 횃불 수

횃불의 수는 고려시대에는 4홰였는데, 한때는 2홰였다가 조선시대에는 5홰로 고정되었다. 5홰는 평시에는 한개의 횃불로 하고, 적의 모습이 나타나면 2개의 횃불, 적이 국경선을 접근하면 3개의 횃불, 적이 국경선을 침범하면 4개의 횃불, 적과 접전하면 5개의 횃불을 올리는 제도이다. 

봉수대의 시설

국경지대에 자리 잡은 연변봉수는 적의 기습을 받을 염려가 있으므로 시설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봉수대는 영조척(營造尺)으로 둘레 70척(21m), 높이 25(7.5m)척에 봉수대 밑의 4면은 30척(9m)이며, 봉수대 주변에 깊이와 너비 각각 10척(3m)인 참호를 팠다. 

참호 밖으로는 끝이 뾰족한 나무말뚝으로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적군의 침입이나 맹수의 습격을 막는데 이용하였다. 또한 나무 울타리 밖으로는 표주(標柱)를 100보 간격으로 세워서 접근을 예방하였다. 

내지 봉수는 연단을 쌓지 않고 연도(煙道)만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연도는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크게 네모 또는 둥근 모양으로 만들되, 그 높이는 10척을 넘지 않게 하였고, 간혹 사나운 짐승의 위험이 있을 때에는 둘레에 담장을 쌓았다. 

봉수대의 횃불시설로는 연대, 연굴(煙窟), 망덕(望德), 약승(藥升), 화전(火箭), 당화전, 화약, 화승, 화철, 부싯돌(火石), 석회, 세사, 초거(草炬), 통, 쑥, 말똥, 쇠똥 등이 있었고, 방호시설로는 장전, 편전, 궁자, 교궁자, 엄심, 염두, 지갑주, 녹쇠천, 작은북, 말목, 칼, 화통, 동아, 종화분(鐘花盆), 싸리홰, 홰, 토목, 사를툴, 교주을, 이탄 등이 있다. 

불 피우는 방법

중국에서는 주로 이리의 똥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리똥을 구할 수가 없어서 대신 쇠똥이나 말똥을 잘 말렸다가 땔감이나 섶과 섞어서 사용하였다. 종화분은 불씨를 담아두는 그릇으로 불씨를 항상 보존하였고, 쑥과 부싯돌, 쇠붙이 등으로 점화하였다. 

봉수의 도달시간

제1노선 봉수는 우리 고장을 통과하는데, 서울에서 함경북도까지 약 550km이다. 처음 국경지대에서 오후에 봉화를 올리면 저녁 해질 무렵게 경봉수(京烽燧) 직전인 아차산 봉수에 도달하였다고 하니, 5~6시간이 걸릴 것으로 시간당 110km를 달린 셈이다. 고속도로에서 고속버스 주행속도가 100km이고 보면, 고속버스보다 전달속도가 빠른 셈이다. 

봉수군의 근무 

조선 세종 때의 연변 봉수군(烽燧軍)은 봉수 가까이 사는 백성 10명을 봉줄로 하고, 3명씩 병기를 휴대하여 봉수대에서 주야로 정탐근무하고 5일마다 교대하게 하였다. 

1446년부터는 우찬성 김종서의 진언에 따라 6명을 더 늘려 10명으로 하고 6명이 8시간씩 교대근무를 하도록 하였다. 또한 수장격인 감고(監考) 2명씩을 임명하여 상하 2교대 봉역 근무를 하였다. 내지 봉수군은 봉졸 6명과 감고 2명으로, 2교대 봉역 근무를 하였다. 봉수군의 임무가 국가의 중요한 기밀을 맡고 있어서 그 임명과 임무, 교체, 봉역 등의 규율을 엄격하게 하였다. 

봉수의 문제점 

북쪽으로는 오랑캐가 항시 호시탐탐 침입을 일삼아왔고, 남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을 때 봉수는 국방의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조선 세종 때 봉수법이 마련되어 성종 때의 대체로 완비되었으며, 4군과 6진을 설치하고 국방을 강화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이 되었다. 

봉수제의 중요한 목적과 기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영에는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첫째 일기가 불순해지면 봉수의 기능이 마비되어 다음 봉수까지 뛰어서 연락해야 하는데, 바람, 눈, 비 등의 악조건이 있었고, 둘째는 봉수대의 위치가 높은 산봉우리이어여 조석으로 일어나는 안개와 구름, 울창한 숲, 맹수에 대한 공포가 있었고, 장기 근무로 인하여 정신이 해이해져 근무태만이 생기는 것 등이었다. 

봉수의 폐지 

국토방어와 확장에 중요한 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봉수의 기능의 정상적인 구실을 못하여 중간에 끊어지고 적군의 상황이 일어나도 평시같이 1개 횃불만 올리는 일이 생겨, 연산군 10년(1504)에는 임시 폐지되었다가 중종조에 다시 부활되었으나 선조 때에는 왜구가 남해안에 침입했을 때라 임진, 정유왜란에도 봉수가 오르질 않고 있었다. 

이 봉수제도는 조선 말엽인 고종 26년(1889)에 경남 망산봉수와 의봉산봉수가 폐지되었고, 고종 31년(1894)에는 모든 봉수가 완전히 폐지되는 비운을 맞았다. 

한이산 봉수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조에는 “강원도로부터 온 것은 양주 풍양 대이산 봉화에 응한다”고 기록하였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하는 지형도에서 남양주에는 대이산 또는 한이산은  젼혀 찾아볼 수가 없다.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순조 34년(1834)에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靑邱圖)에는 접동면과 진벌면 사이에 한이산 봉수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위치는 현재 진접읍과 오남면의 경계가 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맺는말 

우리 고장은 엄청난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 많은 문화유산들이 훼손되었거나 아예 자취를 감추어 겨우 문헌상으로만 나타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한이산봉수이다. 

이제 우리가 한이산봉수를 찾아내어 지표조사를 통하여 발굴, 복원하여, 우리 고장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풍양신문, 1998,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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