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1년간 초빙교수로 미국에 온지 두 달쯤 되어 내가 처음 워싱턴DC를 방문하여 먼저 찾은 곳이 알링턴 국립묘지였고, 두 번째 방문 시에는 지난번에 미처 못 찾아봤던 해병대 유황도작전 기념동상, 멀(Mall)에 있는 월남전 참전 기념동상 및 전사자 비벽, 그리고 최근에 새로 세워진 월남전참전여군동상을 찾아가서 참배하였다.
금년 들어서도 현충일을 하루 앞둔 6월 5일 워싱턴DC 몰에 와서 월남전 전사자 비벽에 묵념을 올렸고, 또한 월남참전 기념동상과 월남참전여군동상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면서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삼키었다. 너희는 먼 옛날 월남전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땀 흘려 함께 싸우던 전우가 아니었던가!
월남전이 한참 치열했을 무렵, 미국 내에서는 반전열기가 대단했었고,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집권층은 월남전에서 철수함으로써 미국의 패전을 가져오게 되었었다.
월남전은 미국의 패전으로 끝났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뜻을 모아 동상을 세우고, 더욱이 100여 미터나 되는 긴 비벽 검은 돌에는 15년간 월남전에서 전사한 57,979명의 이름이 새겨져 후대 사람에게 알리고 있으니 뜻 깊은 일이라 하겠다.
나는 27~28세 때 월남전에서 청룡부대 소총소대장으로 참전했었다. 우리 해병대가 대통령과 해병대 사령관 명령에 의해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전투부대로 월남에 상륙한 것은 1965년 10월 3일이었다. 월남전에서 청룡부대 용사들은 자유와 평화 등의 명분보다 더 앞서는 것이 해병대의 명예와 전통을 빛내는 것이라 자부하고 더욱 용감히 싸웠었다.
9년간의 긴 참전이었지만, 철군과 동시에 자유의 월남 땅을 공산 월맹에게 고스란히 내주고 말았었다. 5년여 동안 해병장교로 복무하고 제대한 후에 현충일이면 꼭 동작동국립묘지를 망문 하였었다. 국립묘지 서22번 묘역에는 내가 월남전당시 소총소대장으로 참전했을 때 아끼던 전우들이 고이 잠들어 있고, 동기생 사관후보생과 기초반 시절의 구대장이 잠들어 있다.
소총소대장으로서 60여명의 부하대원을 손실 없이 살려 귀국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몇 명의 소대원을 국립묘지에 묻고 말았다. 당시의 신문들은 항상 전투상황 보고에서 적 사살 00명, 무기 00정 노획, 아군 피해는 경미하다고 보도했었다. 작년인가 국방부에서는 월남전에서의 전사자가 모두 4,624명이라고 최초로 보도한 적이 있었다.
현충일 국립묘지 서22번 묘역에 가보면, 막내아들 전사에 애통함을 비석에 담은 부정(父情)의 글귀가 담겨있고, 먼저 간 장남을 생각하면 슬픔의 넋을 잃은 노모가 종일 기진맥진하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아버지 전사에 충격을 받고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해병대에 지원입대하여 월남전에 참전하다 국립묘지로 돌아온 아들의 비석 앞에서 술을 따르며 하염없이 울고 있는 노모도 있다.
나는 이분들 앞에서 큰 죄인이 되고 만다. 어쩌다가 소대장이 이들과 함께 귀국하지 못하고 혼자서 살아 돌아온 게 가슴이 아프다. 전쟁은 한마디로 비참한 것이다. 죽은 이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긴,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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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남참전 여군동상 앞에서 / 워싱턴 DC 국립 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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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적 6.25난리 중에 할머니 말씀이 “너희가 자라서는 전쟁이 없어야 할 텐데......”라고 근심 걱정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러나 나는 자라서 월남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6.25 때 내 나이 10살이었고 초등학교 3학년이 된지 몇 개월이 안 되었었다.
그때 6월 26일 학교에 갔더니, 전쟁이 나서 공부 안하니 집에 돌아가라고 해서 경춘국도를 따라서 집으로 가는데, 국군들이 군복에 풀을 꽂고서 군가를 부르며 트럭을 타고 춘천방향으로 흙먼지를 풍기며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국군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인민군들이 커다란 붉은 깃발을 달고 경춘선 철도를 따라 서울로 향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학교에서 등교하라는 소식이 있어서 겁을 먹고 조심스럽게 학교에 가보니, 아! 글쎄 담임선생님이 우리를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모아놓고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 노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놀랄 일이었다.
어느 날 여름밤, 아버지를 따라 동네 회의장에 가보았더니, 내무서원(면사무소를 접수한 인민군)이 따발총을 들고 하는 말이, 의용군에 지원하지 않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겁에 질려 그냥 앉아 있으면, 저절로 의용군 지원자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나의 부친은 3대독자였는데, 졸지에 의용군 지원자가 되어 금곡에 있는 내무서까지 끌려가다가 중간쯤에 있는 돌팍고개에서 어둠을 틈타 숲속으로 도망해서 남양주에서 제일 큰 산인 천마산(812m)에서 몇 달을 숨어 지냈다. 내무서에서 도망자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밤마다 내무서원과 빨갱이가 찾아와서는 할아버지 목에다가 칼을 대고서 아들이 숨은 곳을 대라고 협박하길 수개월이었다.
얼마 후 멀리서 대포소리가 쿵쿵 들려오더니, 날이 갈수록 점점 크게 들려오고, 마침내 국군이 마을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국군이 들어옴으로써 아버지도 천마산에서 내려오셔서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나중에 커서 알고 보니 이 국군이 해병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해병대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하고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후 남양주에서 내쳐 작전을 한 것이었다. 해병대가 우리 아버지를 살렸고, 더욱이 해병대만이 위기의 서울을 구했고 언젠가는 해병대가 통일의 선봉이 될 것을 믿었다. 따라서 해병대를 좋아하게 되었고, 더욱이 성장해서는 해병대 장교가 된 것이었다.
얼마 있으면 6.25 44주년을 맞게 된다. 김일성의 무모한 판단으로 동족 간에 전쟁을 일으켜 당시 3천만 인구 중 300여만 명이나 되는 인명을 죽게 하고 삼천리강산을 온통 잿더미로 만들어놓고서는 지금까지 북한동포들을 배고픔과 헐벗음에서 헤어나질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 업보가 대단하다.
요즘 만주동포의 생활 모습은 1950년대의 남한모습이고, 더욱이 북한은 1940년대의 남한 모습이라고 하니 북한의 2천만 동포가 불쌍하기 그지없다. 김일성은 핵개발에 열을 올리고 불바다니 종말이니 운운하는데, 나이 80이 넘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 가소롭다.
김일성은 어서 빨리 크게 반성하고,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 고려에 귀순했듯이 손들고 내려와서 사죄하고 북한동포들을 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한반도는 서둘러 통일이 되어야만 인구, 국토, 자원, 기술 등이 합쳐져서 세계의 우강국 대열에 낄 수가 있다고 본다.
(한국일보 워싱턴, 1994. 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