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명을 되살리자_1 (75화)
  제10장 [부록] 칼럼1

금년은 일제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지 꼭 50년, 즉 반세기를 맞이하는 해가 된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상생활 용어 중에서는 아직까지도 우리 말을 안 쓰고 일본말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말이 일본말인줄도 모르고 쓰는 경우도 간혹 있다. 

빛깔을 나타내는 ‘곤색’, 냉동식품에서 ‘시야시’, 물건에서 흠집 난 것은 ‘기쓰’났다고 한다. 옷의 용어에서는 일본말을 쓰는게 예사로, ‘아이’와 ‘나시’ 등의 예ㅒ가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애석한 것은 일제치하 때 고의적으로 고유지명을 비하시켜서 개명한 사실들이다. 

금년 들어 경상북도에서는 처음으로 왜색 지명을 바로 잡는 운동을 펴고 있다. 1993년에는 경북 영일군 지행면을 몇몇 인사들의 청원에 의해 지명인 ‘장기면’으로 바꾸기 운동을 펴서 성사시킨 일들이 있다. 우리 고장에서도 지명 바로잡기 운동을 펼쳐야 하겠다. 

우리 고장의 잘못된 지명

우리나라에서 지방행정구역의 8도 명칭이 생겨난 것은 고려 중엽 이후인데,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사용하다가 고종 32년(1895) 2월 26일 칙령 제98조에 의거해 8도가 없어지고 23부(府), 336군(郡)제가 생겨나서 경기지방엔 한성부, 인천부, 개성부가 생겨났다가 그 이듬해인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조에 의해 23부가 없어지고 8도를 13도로 분할한 바가 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통치가 시작된 후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에서는 부령(府令) 제111호를 발표하고 군면통폐합 조치를 하게 됨에 따라 이때 행정구역 명칭이 많이 바뀌었는데, 이때 고의적으로 왜색 지명으로 고치거나, 우리말 고유지명들이 음차(音借)되는 과정에서 왜곡한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제36년 동안 일본은 조선 땅에서 악랄한 수법을 총동원해서 몹쓸 짓들을 해왔다. 풍수지리에서 중요한 산맥마다 쇠말뚝을 박는가 하면, 문화재를 훔쳐갔고, 조선의 문명과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을 펴왔다. 그 중에서도 고의적으로 지명을 바꾸어온 것이 허다하다. 해방 50년을 맞아서 우리가 각성해서 일제 시 개악된 지명을 바로 잡아야 하겠다. 

우리 고장에서 그 첫 번째 예가 ‘구리’의 지명이다. 원래는 구지(임금님의 유택이 모셔진 것에서 유래)였는데,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합쳐지면서 거북 ‘구’자로 바꾸고, 망우리면의 ‘리’가 합쳐져서 ‘구리면’이라 한 것이다. 망우리면은 지금 모두 서울지역으로 편입되어 옛 구지면만 남아 있으므로, 현 구리시는 구지시로 바꿔야 하겠다. 

두 번째는 묘적산이다. 묘적산 묘적사는 조선조 때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훈련장이었으므로, 일제 때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묘적산의 지명을 아예 빼버린 것이다. 본래의 산 이름인 묘적산으로 불러야 한다. 

세 번째 ‘부락’이란 말은 일본에서 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을 부르는 곳으로, 일제의 잔재인 이 말을 없애고 순수한 우리말 ‘마을’로 고쳐 불러야 한다.  
 
▲ 일제시대 조선인 국민학생들의 황국신민서사 암송 장면 / 아침 조회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외어야만 했다

시민, 시의원, 시의회의장, 시장, 공무원 모두가 합심해서 일제의 잔재 용어들을 퇴치해나가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국민학교’이야기다. 필자의 가친(家親)께서는 금곡소학교를 졸업하셨고, 필자는 금곡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나 ‘국민학교’는 모두 신교육에서 일제치하 때 사용된 용어이지만, 일본에서조차 ‘국민학교’는 패망과 더불어 폐지하고 소학교로 환원시켰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잔재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어 한심스런 일이다. 

‘초등학교’ 용어는 일제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전 국민은 황제의 신하, 황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을 부르짖고 여기서 ‘국민’이란 말을 따서 초등학교로 고친 것인데, 우리는 아직도 정부가 정신 못 차리고 ‘국민학교’라고 여전히 쓰고 있는 것이다. 해방 50년을 맞이해서 일본 냄새는 제발 싹 가셔버리자. 

구지(龜旨)

양주군은 본래 35개면이었던 것이 1914년 군면 통폐합이 이루어질 때 16개면으로 줄어들었다. 현재의 구리시 지역은 그 당시 구지면이었는데, 구지면에는 동창, 인창, 사로, 이문, 백교, 수택, 평촌, 토막, 아차, 우미천 등의 마을이 있었고, 망우리면에는 묵동, 내동, 상리, 중리, 하리, 봉현, 신현, 능후, 능래, 적곡, 양원, 방축, 입암 등의 마을이 있었다. 

여기에 노원면의 장기, 갈매, 묘동의 3개 마을과 미음면의 수변, 석도 일부지역, 진관면의 배양리 일부, 별내면의 퇴계원 일부 마을을 병합하여 구지면의 ‘구’와 망우리면의 ‘리’를 각각 한자씩 따러 ‘구리면’이라 하고 묵동, 중하, 상봉, 신내, 망우, 인창, 갈매 등의 12개 리로 개편하였다. 

1953년에는 묵동, 중하, 상봉, 신내, 망우 등 5개 리는 서울시내에 편입되어 7개 리로 되었고, 1973년에는 읍으로, 1986년에는 시로 승격되어 현재 구리시 지역은 옛날 구지면의 지역과 동일하다고 하겠다. 현지 인창, 토평, 수택, 교문, 갈매, 동창의 6개동을 두고 있다. 

문제는 구지면과 망우리면을 합쳐서 이름을 지을 때 고의적으로 거북 ‘구(龜)’자를 아홉 구(九)로 바꾼 것이다. 거북은 용, 봉황, 기린과 함께 네 개의 영물가운데 하나다. 거북이 발휘하는 영력(靈力) 중 하나로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신화시대부터 거북점(복점)이 있어 미래의 일들을 거북에게 물어보았다. 

주(周) 왕조에서는 대대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큰 일을 당하거나 위기를 당했을 때에 거북점을 쳐서 결정했다고 한다. 거북은 천년을 사는 동물로서 장수 동물이기 때문에, 미래 예지의 신통력을 지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거북의 영향은, 거북이 네 발로 버티고 있는 등 위에 신선세계(神仙世界)가 전개된다는 발상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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