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업은 양계 (9화)
  제2장 청소년기

아버지께서는 군에 입대한지 일 년 반쯤 되어서 의가사제대를 하여 집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의가사제대라는 게 단순한 제대가 아니었다. 집에는 할아버지께서 키우던 황소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황소 한 마리가 의가사 제대하는데 들어갔다.

농촌에서는 소가 큰 재산이다. 소가 있어야 논갈이 밭갈이를 할 수 있고 짐을 나를 수도 있다. 황소 한 마리 재산이면 농촌에서는 부자소리를 들을 정도이다. 소 한 마리가 들어간 대신 아버지가 제대하게 되어 집에 오시게 되었다.

아버지는 고향 널울에서 가까운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서 군복무를 하셨다. 휴가 오실 때면 건빵을 몇 봉지 가져다가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처음 먹어보는 과자라 아주 맛이 좋았다. 통조림, 고추장도 몇 개 가져오셔서 먹어보면, 멸치 토막도 있고 제법 맛이 있어서 밥에 비벼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제대하고 오셨지만 시골살림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중학교는 서울로 보내주셨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내고 계셨다. 나 역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는데, 차라리 전쟁이라도 터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돈벌이 할 일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양계였다. 그때 우리 마을에서는 양계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병아리 값을 마련해서 도봉산 창동(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있는 부화장에 가서 암평아리 백수를 사다가 애지중지 키웠는데, 그 중 네 마리만 실패하고 아흔 여섯 마리를 길러냈다.

병아리 사육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도관리와 사료 주는 일이 중요한 기술이다. 특히 높은 생육 온도를 요구한다. 인체 온도는 36.5도C이지만 닭의 체온은 39도C이므로, 특히 병아리일 때 온도를 높여주어야 잘 자란다. 60여일 정도가 자라면 약병아리가 되는데, 이후부터 사료값이 많이 들어간다. 석 달이 지나면 초란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알을 낳기 시작하면 사료값 해결은 되고 경영이 되는 셈이다.
 
▲ 옛날 가내 양계장 모습으로 병아리에게 필요한 높은 생육온도를 높여주기 위해 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다음 해에[도 병아래 100수를 사다가 키워 양계업을 늘려나갔다. 양계는 우리 집안의 달러박스가 된 셈이다. 말이 달러박스이지 사료값 빼고 남는 게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현금이 귀한 농촌에서는 괜찮은 부업이었다.

닭의 사료는 일정한 시간에 주어야 하는데 조금만 늦어도 아우성이다. 닭이 늘어나면서 양계장을 늘려야 했다. 산에 가서 서까래에 쓸 나무를 잘라 오고, 토담을 쌓아 닭장을 만들었다. 문짝은 각목을 사다가 대충 만들었고, 운동장은 섶 울타리를 헐어내고 뒤 채마밭에 남향으로 만들었다. 내가 쓸 토방도 양계장 옆에 붙여지었다.

닭 관리는 밤낮으로 해야 했는데, 밤에는 간혹 족제비가 들어와서 횃대에 올라앉아 잠자는 닭을 물러 죽이는 일이 있어서, 가까이에서 잠을 자다가 닭소리가 나면 얼른 일어나 족제비를 쫒아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닭 사료를 주려고 닭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 마리가 비실비실 먹지도 못하고 있어서 모이 주머니를 만져보니 모이가 소화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닭을 유심히 살펴보니 모이주머니에 분명 이물질이 들어 있어 소화를 못 시키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생물시간에 쓰는 해부도를 찾아다가 모이주머니 깃털을 헤치고 메스로 살갖을 가르니 사료와 함께 밤껍질이 나왔다. 삶은 밤을 까먹고 버린 밤 껍질을 닭이 주워 먹은 것이었다.

모이주머니를 깨끗이 물로 씻어내고 바늘로 꿰메 주고서 며칠 지나고 보니, 생생하게 살아서 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수의사의 경험을 해보았고, 닭의 귀한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양계는 잘 되어 부업으로 학자금의 큰 밑천이 되었다.

 
  금곡중학교 전학 (8화)
  고등학교 편입학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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