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때 만난 4.19학생혁명 (11화)
  제2장 청소년기

1년이 금세 가버리고 고등학교졸업반이 되었다. 내 꿈은 대학에 가서 역사를 공부하고, 모교인 금곡중학교에서 역사선생님을 하면서 고향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대학은 꼭 진학해야 하는데, 심각한 문제는 수학 실력이 너무 약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학원 단과반에서 일반수학을 수강하는 것이었다.

고1 때 배웠어야 할 일반수학을 고3이 되어서야 학원에서 공부해야만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청량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동대문 안)로 들어가서 종로 2가에 있는 학원에서 100분간 수강하고는 다시 성동역(현재 제기동 전철역)에 까지 와서 6시 40분에 떠나는 경춘선 통학열차를 타고 집으로 가야했다. 조금만 늦게 도착하면 통학열차는 떠나기 일쑤여서, 그럴 때면 청량리에 가서 금곡행 시내버스를 타고 금곡에서 널울까지는 한 시간 여를 걸어서 집으로 가야했다.

학원에서의 일반수학 공부는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갈증을 풀어갔다. 한참 수학에 재미를 붙일 무렵 4.19가 터졌다. 어렵게 마련해서 수강비를 내고 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어 한참 힘이 솟을 무렵이었는데, 종로 거리는 4.19혁명의 물결로 어수선하게 되었고, 학원은 일주일가량 휴강하게 되었다.
 
▲ 교내 미술전시회에서 중3 막내 귀염둥이와

4월말에 가서야 겨우 보충수업으로 일반수학 단과반 강좌가 끝났는데, 이것이 내 인생에서 입시학원을 다녀본 전부였다. 일반수학을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더 좋은 대학에 진학했을지 모르지만 운명이었다.

4.19혁명이 진정되고 쉬었던 학교도 정상으로 되돌아가 학교에 나갔더니, 고3 학생은 나 혼자만 학교에 나왔고 1, 2학년생들은 많이 등교하였다. 당시 학생과장은 조권호 선생님이었는데, 상업 담당 선생님으로 서울상대 경제학과를 나오신 분이었다. 고3은 나 혼자 뿐인지라 나보고 즉석에서 학도호국단장의 임무를 명령하시면서 시가행진을 준비시켰다.

졸지에 청량상업고등학교 학생 대표가 되어 기수 단장으로 후배 학생들 300여명을, 이끌고 학교에서 청량리, 신설동, 동대문, 종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시가행진을 하며 큰 거리를 누비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 고교 2년 여름방학 때 서울 우이동에 있는 봉황각에서 / 천도교 중앙학생회 연성회에 일주일간 참석 했다. 가룬데 할머니가 손병희 선생님의 부인이다

자유당 정부는 극도로 문란했고, 더욱이 대통령,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사하게 이루어졌다. 9인조라고 해서 아홉 사람 중의 한 사람 감시 하에 투표장에 들어가서 공개투표를 하였고, 심지어는 투표함 전체를 조작된 것으로 바꿔치기도 했다. 면사무소 공무원은 물론이거니와, 지방 공무원들과 교사, 농협 직원 등은 모두가 선거홍보요원이라고 해서 자유당의 선거꾼으로 전락했다.

민주당의 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는데, 이 구호가 아주 잘 먹혀들어갔다. 자유당 정권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정권 말기의 보였다.

1956년에는 야당 지도자로서 대통령 입후보를 했던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유세도중 비명으로 돌아가시더니, 이번에는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마저 선거 직전 결정적인 시기에 당선을 눈앞에 놓고 세상을 뜨게 되자, 야당 정치권은 기둥을 잃게 되어 허망하기 이를데 없는 심정이었다. 이때 유행했던 노래가 유석 조병옥 선생의 타계를 애도하여 부른 노래 ‘가련다 떠나련다’였다. 학생들은 모도 목청껏 크게 노래를 불러 댔었다.

4.19학생 혁명 이후에 학생들의 욕구가 넘쳐나서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 ‘구두를 신게 허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교 내에서 목청을 높이기가 예사였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도 하여하여 하와이로 망명하였고, 그 대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게 되면서, 사회는 급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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