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다 (13화)
  제3장 대학생활 이야기

161년 3월, 나는 21살의 나이에 정상 보다 1년 늦게 대학생이 되었다. 6.25전쟁이 난지 11년째이고 전쟁이 끝난 지 8년째 되는 해가 된다.

1960년도 우리나라 GNP는 79달러로 농촌에서조차 쌀이 연중 모자랐고 옷은 더욱 귀했다. 1차 산업인 농업과 공업이 상후진국 수준이어서 국민 모두가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거의 다 대학에 진학하지만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대학생의 숫자는 손꼽을 만큼 적은 숫자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에 꼭 진학할 결심이었지만, 부모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상관 없다기 보다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을 나는 결심해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짧은 고등학교 2년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효율족인 노력을 하여 죽도록 열심히 공부하였다. 인백기천(人百己千), 즉 남이 백배 열심히면 나는 천배로 열심히 노력하였다.

고3 가을쯤이었을 무렵, 기차에 내려서 집으로 오는 도중 나는 풀 길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아픈 곳도 없고 다친 곳도 없어도 일어날 기력이 전혀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기운이 서서히 생겨서 일어나 겨우 집으로 갈수 있었다. 아마 영양실조에 과로였던 것 같았다. 말하자면 기초대사량 정도로 살아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대학 진학에서는 학과 선택이 중요했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역사였기 때문에 사학과를 가고 싶었고, 사학 중에서도 동학혁명(東學革命)과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를 연구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생물학과를 진학해서 식물학을 공부하고 싶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특별활동으로 적십자반이었고, 고3 때는 생물반이었다. 생물담당은 김병오 선생님이었는데, 성균관대학교 생물학과를 나오신 분으로 여름방학 때는 성균관대학교 정태현 교수님과 생물학과 대학생들과 함께 양평 문산으로 채집도 다녔다.

국민이 잘 살려면 무엇보다도 사장 중요한 것은 농민이 잘 살아야 했다. 당시의 우리나라 인구 중 농민은 80%가 넘었지만, 온 백성들이 보릿고개에 세끼 밥 먹기가 어려웠던 때였다. 나는 농과대학에 가서 농촌운동을 하고, 농민을 잘 살게 해야 나라가 부강하게 된다고 결심하게 되었고, 농과대학은 서울시립 농대로 결정했다. 우선 이 대학은 전농동에 있어서 집에서 가까워 통학하기 편했고, 그 다음은 시립대학이어서 등록금이 사립대학의 절반 수준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울시립농대에는 원예학과ㆍ수의학과ㆍ농업경영학과ㆍ농공학과ㆍ잠사학과 등 다섯 학과가 있었는데, 원예학과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고등학교 때도 생물방에서 활동을 해서 원예에도 관심이 많았고, 원예학과는 농대에서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학과로 보였다.
 
▲ 대학 1학년 신입생 때의 모습 / 대온실 안에는 3월인데도 열대식물이 무성하다

부모님과 의논 한 마디 없이 입학원서를 사다가 접수하고 시험도 치러 무사히 합격이 되었다. 대학생이 된 것이 무척 기뻤다. 그 당시에 대학생은 그리 흔한 게 아니었다. 고향 남양주만 하더라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자식 공부시키는 일에 관심을 덜 쏟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끼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대학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설령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고등 룸펜(lumpen, 실업자)이 되는 게 예사였다. 산업이 발달되지 않아 취직할 직장이나 회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입학은 되었지만, 그 기쁨은 잠시이고 근심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왔다. 어느 누구와 의논해볼 만한 곳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처음 에는 펄펄 뛰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안 망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하도 안 되어 보였던지 아버지는 여기저기 돈 꾸어볼 데를 알아보러 다니셨지만, 이미 등록 마감날짜가 지나갔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때마침 진외삼촌 액에서 황소 판돈이 있어서 이것을 꾸어다가 등록금을 내게 되었다.

입학금은 3200원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등록 마감일이 며칠 지났지만, 그때만 해도 등록금을 받아주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진외가댁(할머니 친정)은 가평읍 승인리였는데, 진외삼촌은 승인리에서는 좀 넉넉한 집안이었다. 고 2 여름방학 때에는 이 댁에서 한 달간이나 밥을 얻어먹어가면서, 물가에 가서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영어정해> 600쪽짜리 참고서를 두 차례나 독파한 적이 있었다.

1961년도에 서울시립대 원예학과에는 40여명이 입학하였는데, 그 중 7명이 대학교수가 되었고, 모두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우균은 공주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신조영은 원광대학교 한의학과 교수, 유선무는 경복대학교 관광과 교수, 이기의는 강원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이민연은 서해대학교 영어과 교수, 한광희는 우송정보대학교 원예과 교수, 필자 최상범은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7명의 석학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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