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중학교에 입학 (6화)
  제2장 청소년기

금곡초등학교 제 52회 졸업반에서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울의 청량중학교에 여섯 명이 시험을 쳐서 세 명이 입학하였고, 나는 1학년 1반에 반편성이 되었다. 그 당시 청량중학교는 전농동에 있었는데, 현재 서울시립대 자리였다.

강당에서 입학식을 치르고 담임선생님이 소개되었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은 지리 선생님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얼굴이 희고 좀 긴 편으로 말쑥하게 생기신 분이었는데, 첫 인상이 좋아보였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느라고 서울에 처음 가보게 되었다. 널울에서 청량리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비포장도로로, 그나마 하루에 서너 대가 다닐 정도로 버스가 드물었고, 경춘선 기차는 한 낮에 겨우 한 차례의 청량리와 춘천을 왕복하던 때였다. 아버지를 따라서 청량리 시외버스 종점에 내려서 처음 보고 놀란 것은 가게와 집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서울에 가까운 친척은 없고, 할머니 친척 쪽으로 6촌 되는 시누이가 전농동 경춘관사에 살고 있어서 그 집에 묵으면서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시험에 합격해서 그 집에서 하숙을 하기로 했다. 관사 집은 일(-)자 집인데 대문턱이 부엌을 겸해 있고 방 하나를 칸막이해서 쓰는 방 두 개짜리 집이었다.

이 집 식구는 어른 내외와 딸만 셋이 있었는데, 둘은 나보다 어리고 하나는 나보다 몇 살 위였다. 학교에서 내 준 영어교과서를 처음 받아보았는데, 이 집 누나가 읽어주는 발음이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 우습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꾹 참고 들었다.

하숙비는 쌀 여섯 말이었다. 두어 달 이 집에서 살다가 회기동 덕정거리로 옯겼다. 원 씨네 집이었는데, 이 집은 꽤 큰 초가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나누어졌다. 안채에는 원 씨 내외가 살고 사랑채에는 김 씨 노인이 작은 마누라와 그 소생 영희라는 아들이 쓰고 있었다. 나는 그 아들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원 씨네 아들은 형제가 있었는데, 큰 아들은 고등학생으로 좀 쌀쌀한 편이었고, 그 동생 태원이는 나와 동갑나기로 무척 개구쟁이였으나 마음씨가 좋았다. 영희, 태원이, 나 셋이서는 놀러도 잘 다녔다. 조금 떨어진 곳에 왕자표 고무신 공장이 있었고, 조금 더 가면 태창방직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야외수영장도 있고 다이빙대도 있어서 수영과 다이빙을 하면서 놀았다.

또 한 사람 하숙생이 들어왔는데, 고향은 용인이었다. 용인에 있는 태성중학 출신이라는데 고등학교 1학년 신입생으로 촌놈이었다. 촌놈이라고 부른 것은 자기네가 논이 많아 부자라고 늘 자랑했는데, 좀 어벙해 보여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회기동에서 청량중학은 걸어서 10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공부라고는 학교 수업 시간이 전부이고, 집에 와서는 예습이고 복습이고 공부할 분위기가 나는 집은 아니었다.
 
▲ 중학생 때의 필자

우리 반 반장은 나이가 나보다 한 살 위로 얼굴이 넓적하고 잘 생긴 김정배란 애였다.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부자집 아들 같아 보였다. 만년필도 갖고 있었는데, 굵직한 만년필 글씨로 내 새책 뒷장마다 큼직한 한문 글씨로 한문, 번호, 이름을 써 준 친구이다. 그 친구가 요새 고려대학교 총장이다.

그 시절 서울에서는 방을 덮히거나 밥을 짓자면 장작이나 땔나무를 썼는데, 우리 아버지는 소달구지에 땔나무를 싣고 한 방중에 집을 떠나 덕정거리에 도착하면 새벽 여섯 시 경으로 동틀 무렵이 되었다. 아버지는 양식이며 옷가지를 이때 날라다 주셨다. 내가 살던 집은 덕정거리 큰 길가여서 아버지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입학하고 서너 달이 지나 6월 초쯤 되었을 무렵에 집안에 큰 일이 일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32세나 되었는데, 육군 입영영장을 받게 되어 논산훈련소로 입소하게 된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자유당의 횡포가 대단히 심하였는데, 아버지는 자유당이 아니고 야당인 민주당 성향이 강해서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데 된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의 형극로(荊棘路)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열네 살 타향살이가 왜 그리 서러운지 몰랐다. 고향 집에 가고 싶으면 토요일 오후 학교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든 채로 청량리를 빠져나와 제기동까지 온다. 여기서 왕십리 쪽으로 50여미터를 가면 육군 헌병 근무소가 있었는데, 검문할 때 춘천 쪽으로 가는 군용트럭이나 민간트럭이 있으면 무조건 기어올라 타고는 너울에 다 와서 내려달라고 운전석 지붕을 두드리지만 안 세워주고 그냥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지나 언덕의 가파른 마치고개에 이르면 제 아무리 힌센 GMC트럭이라도 천천히 가기 마련인데, 이런 때면 먼저 가방을 차밖 길가로 팽개치고 고사리 손으로 받침대를 잡고 높은 트럭에서 뛰어내리곤 하였다.

고향 집은 언제나 푸근하고 좋은 곳이었다. 하루를 고향 집에서 보내고 일요일 오후가 되면 항상 만원인 시외버스나 기차를 타고 상경하여야만 했다. 언젠가는 청량리 기차역에서 쌀 서너 말을 울러메고 책가방을 들고 플랫폼으로 걸어가는데, 너무 무거워서 쌀자루를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쌀자루가 터져 쌀이 길바닥에 쏟아진 일도 있었는데, 무척 속상했었다.

어느덧 1학기 말이 되어 종업식을 하고 성적표를 받아보니 평균 77점이었다. 여름방학 숙제로 식물채집이 있어서 여름방학 내내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뒷산에 올라가 식물채집을 하고 정성스럽게 잘 말려서 표본을 만들었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서 그랬는지 식물채집이 재미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니 새로운 걱정이 생기게 되었다. 2학기 등록금이며 하숙비로 낼 쌀이며 엄두가 나지 않았고, 앞날이 캄캄할 뿐이었다. 학교 가기를 포기하고는 휴학원서나 자퇴원서도 내지 않은 채 상경하지를 않았다. 중학교를 포기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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