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의 내력 (1화)
  제1장 고향 이야기

나의 고향 널울(板洞또는 板谷ㆍ김정호의 청구도 지도에 나오는 한자 지명)은 현재 남양주시 호평동이었지만, 내가 태어날 때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호평리였다. 서울에서 동북방면으로 60여리 떨어진 산골마을이다. 북쪽으로는 천마산(天摩山, 812m)이 우뚝 서 있고, 남쪽으로는 묘적산(妙寂山, 590m) 자락이 둘러싸여 서로 얼싸안고 있는 분지(盆地)인 곳이다.

앞 뒷산이 높다보니 마을의 터전도 높아서 이웃 금곡(쇳골)이나 마석우리(맷돌모루)보다 훨씬 높아 눈이 많이 내리고 춥기도 더한 곳이다. 널울은 호평리의 홈안, 느티울, 가운데말, 지새울, 벌말, 구멍터 등 6개 마을과 평내리의 담안, 새탄말, 움터골 등 세 마을로 이루어졌다.

‘널울’이란 말은 ‘넓은 동네’라는 뜻으로, ‘널’은 넓은 것을 가리키고, ‘울’은 마을이란 의미가 있다. ‘울’은 널울, 느티울, 장재울, 광대울, 아치울 등 시골마을 이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명이다.

내가 태어난 때는 양력으로 1941년 11월 23일이다. 간지로는 신사(辛巳)년이고, 음력으로는 시월 초닷새가 된다.

아버지(한영ㆍ漢永)는 3대독자였는데, 일찍이 18세에, 그리고 어머니(이순임 李順任) 역시 18세에 동갑내기로 정월에 혼인하시어 시월 상달에 내가 장남으로 태어났다. 3대독자로 손이 귀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집안의 경사야 이루 말할 나위 없었다. 어머니는 전주 이 씨로 친정은 천마산 너머 화도읍 가오실(가곡리)이다. 전주 이 씨 집안에서 3남 3녀의 막내딸로 태어나신 분이다.

나의 본관은 경주이고, 중시조는 신라 말엽 헌강왕 때의 유명한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으로서 나는 30세 손이 된다. 원래 득시조(得始祖)는 신라 이전 진한에 속했던, 6촌 중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공이다. 당시 6촌장들은 경주 나정(蘿井)에서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받들어 모시고, 그 공로로 각각 성(性)을 하사 받게 되었다. 경주 이, 정, 설, 배, 최씨 등 6성이 이때 하사받은 성씨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이 생겨 난 효시가 된다.

득시조 소벌도리공 이후 신라 말엽까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을뿐더러 고운 선생 같이 훌륭한 학자가 태동하게 되었으므로, 경주 최 씨 가문에서는 그 분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있다. 고운의 아들이 은함(殷含)이고, 손자가 최승로(崔承老)이다. 이 분은 고려 개국의 공신으로 고려 6대 성종에게 시무책이십팔조(時務策二十八條)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 중시조 관가정 최청 초상    
따라서 우리 조상은 고려 개국과 함께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고려 말엽까지 460여 년간을 살게 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에 정권을 찬탈하고 조선을 세우게 되니, 고운의 11세 손으로 고려조에서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내신, 휘(諱)가 청(淸)인 할아버지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여 개성의 두문동에 잠시 은거했다가, 양주 풍양현(지금의 남양주 진진면 송릉리 아랫독정)으로 아주 은둔하여 사시게 되니, 이로써 우리 집안의 살림터전을 잡으시게 되었고, 나의 고향이 된 것이다.

청 할아버지께서는 시호를 관가정(觀稼亭)이라 하였는데, 그의 후손을 관가정파라고 부른다.

선조들은 풍양에서 은둔해서 살다가 벼슬길에 오를 때면 한양에서 사시기도 하고, 조선조 말엽에는 과천에서 살아오시기도 했다.

관가정 할아버지의 윗대 산소는 개성에 있어 알 길이 없고, 관가정(11세)과 그 아들(12세), 손자(13세)의 산소는 남양주 진건읍 송릉리 아래독정에, 14세 광문(光門ㆍ참판공) 할아버지부터 5대에 이르기까지는 호평동에 그리고 19세 정(淨) 할아버지로부터 6대에 이르기까지는 과천에 산소가 있다.
 
25세 형주(亨柱) 할아버지는 포천에 묻혀 계시고,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4대는 호평동 선영에 차례로 잠들어 계신다.

26세 영조(榮祚) 할아버지께서 포천에 사시게 된 연유는 과천에서 벼슬 없이 시골선비로 살다보니 궁하기가 이를 데 없던 차에, 처남 되시는 분이 포천 원님을 하셔서 그곳에 사시게 되었다고 한다.

삼형제 이셨는데, 둘쨋 분인 나의 고조할아버지는 신혼시절에 천주교 박해를 만나 큰 변을 당하게 된다. 옛날 당쟁에서 밀린 남인(南人) 계층에서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하였던 것으로, 새로 시집오신 고조할머니께서 서학을 깊이 신봉하시었다고 한다. 천주교 박해로 큰 고조할아버지께서는 한강변 양두진에서 순교하시고, 나의 직계 고조할아버지는 야음을 틈타서 포천에서 도주하여 가평군 명지산 자락 잣둔(백둔리)이란 곳에서 은거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남양주 널울로 입향하시게 되었다.

널울에는 일가들이 먼저 들어와 살고 있었고, 선조를 모시는 문중산이 26여 정보가 있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증조할아버지 시신을 하얀 창호지에 싼 유골을 며서다가 호평동 지새울 분토골에 이장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증조할아버지는 명지산 자락 잣둔리 달터란 곳에 움막을 짓고 내외분이 초근목피로 살아가시던 중, 어느 여름날 장마철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더니, 건너 편 산에서 “빨리 건너 오너라”하는 우렁찬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와서 하도 다급하고 또렷한 소리라서 두 내외분이 장대 같은 장마비를 뚫고 그 집에 당도하여 무슨 일로 급히 불렀느냐고 물어보니, 그 집에서는 그런 일 없다고 말하는 동시에 천둥벼락을 치면서 산사태가 일어나 증조할아버지가 사시던 달터의 움막집을 순식간에 덮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렸을 적에 이때의 이야기를 항상 내게 하시면서 우리 가문은 조상이 늘 보살피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언젠가는 잣둔리 달터란 곳을 찾아가 증조할아버지가 사시던 곳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아직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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