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고향집 (3화)
  제1장 고향 이야기

우리 집의 농토는 논 열두 마지기와 밭 천여 평 쯤 되는 게 전부였다. 이것으로는 열한 식구의 일 년 식량거리는 겨우 되지만 살림에 필요한 돈은 항상 궁했다.

우리집에는 산이 있어서 가을이면 밤을 몇 가마씩 따고, 울안 뒤에는 큰 대추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서 대추도 몇 달 씩 땄는데, 가을이면 초가지붕 위에는 대추 말리는 바구니가 새빨갛게 널려 있었다.

우리집에는 양잠(養蠶)도 해마다 열심히 하였다. 양잠은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로 춘잠과 추잠을 하게 되는데, 봄에는 두 장(누에알 두 상자), 가을에는 한 장씩 쳤다. 밭에는 뽕나무도 많이 심었는데, 누에가 다섯 잠이 들 무렵이면 다 자라서 먹는 양이 대단하여 밭에 심은 뽕나무만으로는 뽕잎이 모자라서 천마산에 가서 산뽕나무 잎을 따오는 게 큰일이었다.

나는 학교에 갔다 와서 어머니의 뽕보따리를 받으러 지게를 지고 천마산 마당재(현 ‘천마의 집’ 부근에 있는 고개)까지 가서 받아오곤 했다. 천마산 산뽕나무 잎마저 모자랄 경우에는 동네사람들과 함께 가평 북면 명지산 자락의 먹목리까지 가서 산뽕나무 잎을 따오기도 했다.

봄이 오면 천마산에는 산나물이 많이 나오는데, 나도 어머니 따라 산나물을 뜯으러 다녀보았다. 점심 때가 되면 새로 돋아난 밀나물이나 참나물을 된장에 찍어서 밥반찬으로 먹는 맛은 지금도 침이 돌 맛있는 식사였다. 천마산 정상 보로 밑에 있는 약물바위 밑에서 나오는 샘물의 물맛은 생명수와 같았다. 겨울철이 되면 천마산에서 땔나무를 해오고 봄과 여름이면 약초도 많이 캐온다. 동네사람들은 그래서 천마산을 화수분(재물이 자꾸 생겨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부른다.

외할머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나의 외가는 가오실(화도읍 가곡리)이다. 내 고향 널울은 남양주의 맨 가운데 있어서 지붕을 이루는 천마산의 남쪽마을이고, 외가댁은 천마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릴 때에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그리고 좀 자라서는 어머니 손목을 잡고 산길을 걸어서 외가댁을 무던히도 많이 다녔다.

외가댁을 가려면 천마산 자락과 묘적산 자락이 마주잡고 있는 마치고개(240m)를 넘어서 먹갓(옛날에 묵현원이 있어서 영동지망에서 서울로 가는 가난한 선비들이 여기서 쉬어 자고 가면서 빛바랜 갓에 먹물을 입힌다고 함)을 거치고 직골을 지나서 윗닭계를 거쳐 너브네고개(240m)를 넘으면 가오실이 나온다. 이십여 리 산골이다. 어머니는 머리엔 외할머니께 드릴 떡모판을 이고 빨리 따라오라고 나를 보채시면서 친정길을 다니셨다.
 
▲ 파란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천마산 마루에 걸렸다

외할머니는 얼굴이 보름달 같이 둥글고 언제나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셨다. 자신의 손주도 나와 동갑이지만, 친손주보다 외손주인 나를 더 좋아 하신 것 같았다. 늘 자상하셨고, 먹을 것 맛있는 것을 언제나 챙겨주시느라 애쓰신 외할머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음먹고 딱 한번 산소를 찾아 성묘한 것이 고작이다. 와부읍 도곡리에 사시는 외사촌누나의 셋째 딸이 꼭 외할머니를 닮아서 그 조카를 보면 외할머니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내가 30여년 간을 살았던 고향집은 지금은 헐려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요새는 그 집이 꿈에 안 나타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집이 꿈에 자주 나타나곤 하였다. 분명히 꿈속에서도 철둑 길 넘어 넓은 밭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했는데도 그 초가집이 자주 나타나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집 울안 뒤에 있는 배나무 두 그루마다 배꽃이 활짝 피어서 화사하게 울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향 집은 지은 지 백여 년이 된 초가집으로 ㄱ자 안채와 ㄴ자 사랑채의 입구(口)자 모양이었다. 안채에는 대청마루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건넌방이 있고, 왼쪽으로는 뒷방과 안방, 그리고 부엌이 이어져 있었다.

사랑채에는 대문 안쪽에 마구간, 오른쪽으로는 사랑방이 있고, 꺾어져서 광채와 헛간이 이어져 있어서 안채 지붕과 서로 붙어 있고, 안채와 사랑채 가운데는 네모의 안마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안채 뒤뜰에는 굴뚝 쪽으로 토담이 있고, 토담 옆에는 큰 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으며, 토담 밑을 따라서 흰 옥매화가 자라고 있었다.

부엌 쪽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 양옆에는 배나무 한 그루와 복숭아나무가 서 있다. 우물가 쪽은 섶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밑에는 백합 꽃밭이 있었다. 나는 어릴 때 봄이면 백합 뿌리를 캐서 구워 먹기도 했는데 달짝지근했다. 우물가 쪽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돌 받침대 위에 장독들이 큰 것 작은 것 해서 여남은 개가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장독대 옆 돌담 가 터주(집터를 지키는 지신)에는, 오지항아리에 햇벼를 담아 모시고, 볏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씌운 터주자리(터주까리)가 모셔져 있었다. 우물과 장독대 사이에는 김치각이 있었는데, 겨울철이면 가을에 김장한 김장 배추와 동치미 독이 서너 개 묻혀 있어서 겨우내내 들락말락 김치를 퍼다가 조석으로 반찬을 대주었다.

뒤뜰 담 너머에 있는 백여 평 쯤 되는 텃밭에는 감자와 채소를 심었고, 밭가에는 밤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 밤나무는 가평 진외가 댁에서  어린 묘를 얻어다 심은 것으로 밤알이 무척 굵었는데, 가을철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밤새 땅에 떨어진 알밤을 주웠다.

밭가를 따라 돌덤불이 있고 대추나무 대여섯 그루가 서 있었는데, 중공군이 들어와서 모두 잘라 방공호 만드는데 써버렸다. 부엌과 마구간 사이 처마 밑으로 빠져 나가면 화장실이 있는데, 집안에서도 쓸 수 있고, 바깥에서도 쓸 수 있는 안팎 겸용 측간(뒷간) 이었다. 그때만 해도 시멘트로 만든 개량변소였었다는데, 지붕은 네모뿔 초가지붕이었다.

사랑채 마당은 넓었고, 한쪽에는 황소를 매어두는 곳과 두엄 무더기가 있었다. 마당 동쪽 기둥 언덕 위에는 커다란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열매가 많이 달리라고 대추나무 사이에 돌을 끼워서 시집보내기를 하였다.

대추나무 옆으로는 잿간 변소가 있었는데, 주로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를 모아두는 곳이었다. 이 변소간은 원형으로 토담을 쌓았고, 원뿔형 지붕의 초가였다. 그 옆으로는 백여 평 되는 텃밭이 있고, 밭 옆으로는 한마지기 쯤 되는 논이 있었다. 논가를 따라서는 철길 둑이 가로 놓여 있었다. 철둑길 너머에도 하루갈이 쯤 되는 밭이 있었는데, 철도가 생기면서 양쪽으로 제금이 나고 말았다.

사랑채 굴뚝에는 구들이 나와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겨울에는 동향이라 햇볕이 잘 들고 바닥이 따뜻해서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이 옆으로는 작은 실도랑이 흐르고 있는데, 아침마다 세수하고 양치질 하는 것이고, 때로는 물장난 하는 곳이기도 했다.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는 걸레도 빨고 요강도 부수는 곳이기도 했다. 물이 귀할 때 물놀이 하면 구장 어른이 물꼬를 보러 오다가 야단을 쳐서, 그 분이 나타나기만 하면 슬금슬금 피하기도 했다.

이 집은 내가 해병대 장교로 제대하고 서너 해 쯤 지나 너무 후락하고 기울어져 헐어냈는데, 쇠못 하나 쓰지 않고 전형적인 조선 민가 건축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나는 이 초가집의 안방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서 정들었던 집이어서인지, 그 집이 꿈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음에 고향에다 새로 전원주택을 지으면 꼭 배나무를 심고 감나무도 한 그루 더 심고 싶다.

집의 당호(堂號)를 이시헌(李柿軒)이라 짓고 현판을 걸었었는데, 이 현판은 예쁜 느티나무 판자에 청색 글씨로 각자(刻字)한 것으로,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거실벽에 걸어놓고 있다. 이 현판이 부적이 되어서인지, 이제는 내가 살아왔던 초가집이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살았던 그 초가집을 스케치 해 놓았는데, 언젠가는 화가에게 부탁해서 그 초가집을 그림으로라도 재현해서 거실에 걸어놓고 싶다. 

 
  우리 집안의 이야기 (2화)
  초등학교 시절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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