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6.25 (5화)
  제1장 고향 이야기

1950년 6월은 내가 금곡초등하교 5학년 일 때였다. 4월에 개학해서 1학기가 석 달쯤 지나갔을 무렵인 6월 25일(월), 여늬 때와 마찬가지로 널울 집에서 10여리 길을 건너 금곡에 있는 학교에 갔더니 난리가 나서 공부를 안 한다고 하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결국 교실에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담인 김춘성 선생님도 못 뵙고 학교 운동장에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금곡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경춘국도에는 국군들이 트럭에 타고 철모와 군복에 풀을 꽂고서 군가를 부르면서 춘천 쪽으로 흙먼지를 날리면서 가는 것이 보였다.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아주 반가이 맞아주면서 “너희들은 전쟁을 보지 말아야 하는데” 하시면서 걱정이 대단하셨지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 해에는 가물어서 모내기가 늦어졌었다. 어느날(아마 28일 쯤) 모내기 하는 날이어서 나도 논에 나가서 일을 거드는데 경춘선(서울에서 춘천 간의 철길) 철도를 타고 마석 쪽에서 붉은 큰 깃발을 단 선도차량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며칠이 지나 학교에서 오라는 소식이 있어 학교엘 갔더니, 무더운 여름날 커다란 플라타너스 그늘 밑에 3학년 생 우리 반 학생을 모아놓고 담인 김춘성 선생님이 김일성 노래를 가르치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담임 선생님은 지하 빨갱이였다고 한다. 김춘성 선생님은 춘천사범학교 출신으로 금곡초등학교에서 풍금을 제일 잘 치고, 창가(그때는 그렇게 불렀다)도 제일 잘 하는 음악선생님이었다. 우리 집에도 몇 차례 방문하여 아버지와도 친분이 있는 선생님이어서 나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이 남침한 후 동네에서는 밤마다 회의를 하였는데, 7월 어느 여름날 밤 아버지를 따라 회의장엘 가보았다. 회의 장소는 동네 어느 농가의 바깥마당이었다. 이 날의 회의 분위기는 어느 때와는 좀 달랐는데, 내무서원(면사무소 직원에 해당)이 동네 사람을 모아 놓고 따발총을 겨누고서 인민군에 지원하지 않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지원할 사람은 남아 있고, 지원하지 않을 사람은 총부리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냥 앉아 있으면 고스란히 지원병이 되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를 비롯하여 마을 청년들은 졸지에 의용군 지원자가 되고 말았다. 야밤에 널울에서 금곡까지 줄 지어 걸어가던 중 돌팍고개에서 아버지는 아반도주하여 천마산 깊은 산 중에서 석 달간을 숨어서 지내야 했었다. 할아버지는 땔나무 하러 가는 척 하고는 지게에 쌀과 반찬을 지고 날라댔는데, 이것을 눈치 챈 동네 빨갱이는 매일 저녁이면 우리집에 와서 할아버지의 목에다가 창 끝을 대고 아들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열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자라서 꼭 복수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멀리서 쿠웅 쿠웅 하는 소리가 혼연히 들려오길 며칠이 되었다. 어느 날 대낮에 국군이 왔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집 앞에 있는 경춘선 철로에 군인들이 철둑길을 따라 붙어 있었다. 500여미터 떨어진 뒷동산에는 인민군이 굴을 파고 며칠 씩 있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집은 그 사이에 놓이게 된 것이다. 저녁이 될 무렵 국군들이, 밤이 되면 인민군이 마을로 내려올 테니 움터골 경춘국도변으로 가서 모여 있으라고 하면서 대피시켰다.

국군은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하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였고, 10월 1~7일 사이에는 남양주 일대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우리 마을에 진군하였다. 이때의 국군이 대한민국 해병대라는 것을 먼 후일에서야 알게 되었고, 해병대가 아버지를 살려낸 고마운 군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겨울이 되어 중공군이 쳐들어오게 되자, 이번에는 피난길에 올랐다. 마차에 쌀, 이불, 옷보따리를 싣고, 금곡을 거쳐 덕소 한강에 오니, 한강이 꽁꽁 얼어붙어 있고, 강을 건너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멈추고 있는 사이에 중공군이 다시 들이닥쳐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피난 길에는 흰눈이 온통 땅을 덮었고, 길 가에는 간난애가 요에 싸여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남침하여 내려오는 중공군을 보니, 10여 명 중 맨 앞에 선 병사만이 총 한 자루씩 갖고 있었고, 나머지는 방망이 수류탄만 어깨에 매고 행군하는 모습이었다. 중공군은 흰 치마를 두르고 행군하였는데, 미군 비행기가 하늘에 뜨면 일제히 엎드려서 흰치마를 뒤집어서 위장하였다.
 
▲ 중공군

집에 돌아와 보니 우리 집은 중공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방은 내주어 살수가 있었는데, 중공군들은 낮에는 산 속에 올라가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내려와서 잠을 잤다. 물자 소송은 말로 하였는데, 낮이 되면 말을 마치굴에다 숨기곤 하였다. 건넌방에는 중공군 장교가 있었는데, 나하고는 잘 놀아주었다. 처음 본 쌍안경으로 마구간의 황소눈을 보니까 무섭도록 커보였다.

종공군의 비상식량은 미숫가루였는데, 뱀자루 같은 것을 어깨에 둘러매고 다녔다. 발에는 양말이나 버선을 신는 것이 아니고 천으로 발을 칭칭 감싸는 발싸개였다. 집 안에는 오줌을 모아두는 오줌자배기가 있었는데, 중공군이 밥을 지어 오줌자배기에 퍼서 나르는 것을 보고 우리 식구들을 속으로 무척 우스워했었다.

집 헛간과 앞 채마밭에는 피난 길에 땅을 파고 벼가마니를 묻어두었는데, 어떻게 찾아냈는지, 파내어 징발해가고는, 군표(군인수표)를 주면서 해방이 되면 돈으로 찾을 수 있다고 얼버무리며 빼앗아갔다.

어느날 저녁 미군 포로 세 명을 끌고 왔는데, 미군의 옷과 양말, 장갑을 모두 중공군이 빼앗아 차지하며, 그들은 헐벗고 배고픈 모습에 큰 키가 기역자로 굽어져서 끌려다니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다.

겨울 해는 짧아서 금세 저녁이 되고, 어둠이 깔린다. 어느날 초저녁에 사랑채 밖에서 인기척이 나서 대문을 열고 나가보니까 아! 우리 담임 김춘성 선생님이었다. 어린 나였지만 무척 놀랐다. 사랑채에 모시고 어머니가 저녁상을 잘 차려 대접했는데, 무척이나 시장했던지 식사를 잘 하셨다. 할아버지와 말씀을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니, 중공군이 남침을 하게 되어 자기도 따라서 임무 수행하느라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라고 하면서 하루를 묵고 떠났다.

한달 쯤 지났을 무렵, 김춘성 선생님은 중공군이 후퇴하는 길에 우리 집에 다시 들러서 하루를 또 묵고 갔다. 그런 후로 이 분이 진짜 빨갱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잘 가르쳐주셨던 담임 선생님의 소식은 그 후 알 길이 없었는데, 그 당시의 초췌한 모습으로 보아 오래 살지도 못하였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휴전이 되고 학교는 다시 시작되었다. 학교 건물은 전쟁 중에 불타 없어져서, 금곡릉(조선의 마지막 고종황제 홍릉과 순종황제 유릉) 안에 있는 재실 건물들이 학교 교실이 되었는데, 우리는 여기서  4, 5, 6학년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게 되었다. 교실들은 맨바닥이어서, 우리는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공부하였다. 책상 대신 과일상자나 콜라 상자가 있으면 훌륭한 책상이 되었지만, 그것마저 없어서 널짝한 골판지 양쪽에 구멍을 내서 끈을 매달아 어깨에 매고 책상을 대신하였다.

우리는 금곡초등학교 동창모임을 가질 때면 금곡릉 안에서 모여 옛 둘러보고 잔디에서 하루를 즐긴다. 

 
  초등학교 시절 (4화)
  청량중학교에 입학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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