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 하면 그 말은 십년이란 세월은 강산도 변하는데, 인간은 얼마나 변하겠느냐는 속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아왔다. 특히 무대 예술 쪽의 일을 해왔기 때문에 많은 연예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인기를 얻고 최고 스타가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예술 행정은 예술가들이 보다 편리하게 예술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다. 따라서 나는 업무상 뒤에서 그 예술가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일반인들은 예술가들의 앞 모습만 볼수 있지만, 나는 그들의 뒷모습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예술가들의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전자 회사 광고의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카피가 있었다. 그만큼 선택이 중요하다는 얘기인데, 나 역시 예술행정을 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선택을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지금도 선택을 아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가수 김연자를 일본에 진출시킬 때 나의 선택은 매우 옳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무명가수 김연자가 지금과 같은 대형 가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몇 년 전의 일로 기억하는데,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가수 김연자를 특별 초청해 그녀의 공연을 직접 관람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조금 놀라웠다. 예술 속에는 이데올로기도 뛰어 넘는 그 어떤 힘이 있다는데 놀랐고, 그리고 김연자가 북한에서 인기를 끌 만큼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는 데 다시 한 번 놀랐다.
벌써 오래 전이지만 내가 주선을 하지 않았다면 김연자는 일본에 갈수 없었고, 지금처럼 대형가수가 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재능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열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예술 행정은 바로 그런 재능 있는 예술인들을 발견하여 뒷받침 해주는 일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1960년대만 해도 연예인들이 외국에 나가기 힘들었던 시절이다. 문공부 추천을 받아야 외국에 나갈 수 있는데, 추천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이라고 기억되는 어느 날 연예기획자 박호 씨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가능성 있는 신인 여가수를 발견했는데 한번 만나 줄 수 있겠소?”
“내가 만나서 뭘 어쩌게요?”
“어이, 그냥 얼굴 한번 보자는 건데 뭘 그래?”
박호 씨는 다음 날 무작정 그 여가수를 데리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여가수는 당시 15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그녀는 가수라기 보다는 시골에서 처음 서울에 올라온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 같았다.
“어때요? 일본에 가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이 주사?”
박호 씨는 내 팔을 잡으며 동의를 구하였다. 당시 나는 문공부에서 주사로 일하면서 일반 공연 및 연예인 해외 추천 업무를 맡고 있었다.
“지금 나보고 이 아이를 일본에 보내달라는 거요?”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왜, 이 아이가 어때서?”
박호 씨는 나보다 열 살 이상 연배였다. 당시 연예계에서 연예기획자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 무렵에 그는 일본에 연예인을 송출하는 일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한번 떼를 쓰면 들어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끈질긴데다가 무조건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아마추어는 곤란해요. 지금 국내에서 잘 나가는 가수가 일본에 가려고 애를 써도 어려운 판인데......”
사실이 그랬다. 일본에 가면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생각에 유명 가수들도 일본 진출을 꿈꾸고 있었지만, 조건이 까다로워 웬만해서는 허락해주지 않는 형편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성공한 가수로는 이성애 씨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과 일본을 자주 왕래하며 활발한 가수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국내 가수들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본에 가서 돈 벌고, 국내에서 인기 끌고 꿩 먹고 알 먹고 였던 것이다.
“내가 확신해요. 김연자는 일본에 가기만 하면 최고 가수가 될 수 있다구.”
박호 씨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성애는 국내에서도 인정받는 가수였지만, 이 애는 아직 데뷔를 한 상태도 아니잖습니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설사 김연자를 일본에 보내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서류를 작성할 때 결격사유가 많아 난처하다는 것이었다.
“동생, 나를 믿어줘. 이 박호가 책임질게. 아, 이 형님이 장담한다니까!”
결국 나는 박호 씨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그와 나는 사석에서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친한 관계 때문에 특별히 간청을 들어주자는 생각은 아니었다. 실제로 김연자의 노래를 들어보니 기대 이상의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에 비하면 어른스러웠으며, 가창력이 아주 뛰어났다.
“어때, 잘 하지?”
“노래 하나는 아주 수준급이군요. 한번 노력해보겠습니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간단하지 않은 수속절차를 밟아 김연자를 일본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일본에서 김연자가 대히트를 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박호 씨가 재능 있는 가수 보는 눈이 누구보다 정확하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김연자는 일본에서 인기 있는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아마 그녀는 나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을 것이다. 내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까마득한 옛날, 그녀의 무명시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당시 내가 김연자를 일본에 보내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의 노래 실력이면 국내에서도 가수로 크게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행운의 기회라는 것이 있고, 그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기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 만약 김연자가 무명가수 시절 일본에 진출하지 못했다면 성공하기 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보다 많은 우여곡절이 뒤따랐을 것이다.
김연자가 가수로서 일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재능을 알아주는 박호 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호 씨의 주선이 없었다면 그녀는 무명가수로 일본에 진출하는 행운의 기회를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술행정가는 어쩌면 예술가에게 ‘행운의 기회’를 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기회를 이용하여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만이 ‘행운의 티켓’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