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경호팀의 놀라운 순...

정확한 연도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워커힐호텔에서 만찬과 함께 특별공연이 있었다.

나는 당시 공연총책임을 맡았는데, 공연 중일 때 마침 박정희 대통령 바로 뒤에 있었다. 그 자리에 일부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공연을 지휘하다보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빠른 조치를 취하기 위해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날 공연 도중 정전사태가 일어났다. 외국 대통령과 국가 원수가 같이 한 자리에서 정전사태가 일어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준비를 허술하게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정전이 되면 대통령 경호가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전이 일어나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였다. 갑자기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 주위를 쫙 둘러쌌다. 공교롭게 나도 경호원들 가운데 둘러싸이게 되었다. 정전사태에 대한 조치고 뭐고 할 수도 없이 그 자리에 꼼찍 못한 채 갇혀 있어야만 했다.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앞의 미국 포드 대통령의 자리를 보니 전혀 엉뚱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포드대통령과 모습이 비슷한 경호원이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앉아 있었는데, 나는 가까이에 있었으면서도 언제 그들이 자리를 바꿔치기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정말 순발력 있는 경호가 아닐 수 없었다.

만약에 그 정전이 대통령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테러범들의 소행이었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 경호원들은 그런 것 까지 감안하여 재빨리 포드 대통령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대신에 허수아비를 그 자리에 앉혀 놓은 것이었다.

다시 질서가 잡혀 공연이 재개될 무렵, 미국 포드 대통령은 공연장 저쪽 구석에 서 있다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얼마나 무색하였을까. 생각만 하여도 한국의 경호는 엉망이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로 한국 경호원들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직접 미국에 가서 경호방법을 배워온 이후부터 미국식 대통령 경호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약간 다른 이야기에 속하지만, 국빈을 모시고 공연할 때마다 대통령과 가까운 자리에 있다 보니 나에게 뭔가 부탁을 하려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국립극장에 와서 육영수 여사가 공연을 관람하실 때의 일이었다. 경호가 엄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영부인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국가원수를 모시는 공연을 전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언제나 자유롭게 전근할 수 있었다.

공연에 올라가기 전 극장 앞에 나와 서 있는데, 누군가가 나의 소매를 잡으며 사정 조로 말하였다.

“이 선생, 영부인 한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얼핏 쳐다보니 흰옷을 즐겨 입는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이었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흰옷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 라자로마을 돕기 기금마련 파티에서 앙드레김과 악수

“영부인은 왜요?”
“영부인께 인사를 좀 드리려구요. 그런데 경호가 엄해 어디 만날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나는 앙드레 김이 왜 육영수 여사를 만나려고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영부인과 안다는 사실 하나로 유명세를 타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당시만 해도 그는 그렇게 유명한 패션디자이너로 알려진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육영수 여사는 고급 미색 양단으로 한복을 지어 입은 지어 입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옷매무새와 자태가 너무 곱고 아름다워 돈 많은 귀부인들이 그 옷감을 즐겨 찾곤 했었는데, 당시 시장에서도 그 옷감을 ‘청와대 갑사’ 또는 ‘육영수 가라’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처럼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패션의 유행을 주도하는데도 영향력을 갖고 있을 정도였으므로,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으로서는 꼭 만나고 싶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약 영부인에게 그가 만든 옷을 선물하여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소문이 난다면, 그는 일약 최고의 디자이너로 각광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튼 앙드레 김이 하도 매달리며 사정을 하는 바람에 나는 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정인형 경호처장에게 말했다.

“경호처장님, 이 사람이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인데 영부인과 눈인사만이라도 하고 싶답니다.”

경호처장은 나와 앙드레김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손을 들어보였다.
“이따 봅시다!”

공연이 다 끝나고 나서 영부인이 극장을 나설 때 앙드레김은 나와 함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기 때문에 경호처장의 허락 없이는 일만인이 그곳에 지키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영부인이 극장 입구로 나설 때 정인형 경호처장이 앙드레김을 소개시켰다.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 선생입니다.”

앙드레김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영부인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듯 약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해서 앙드레김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이후 앙드레김은 한국 패션업계의 대포적인 디자이너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