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이 강한 문화행정가 (9)
  제8장 명사들이 보는 이종덕2

육완순 (무용가,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이종덕 씨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뚝심 있는 문화행정가’의 이미지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관철시키고야 마는 우직한 고집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의 현대무용은 거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예총 산하에 한국무용협회가 있기는 했지만, 그 협회 회원 90%는 한국무용회원이었고, 현대무용회원은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활동지원이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1980년 6월에 제자들과 합심하여 현대무용가들의 활발한 무대활동을 구축하기 위한 한국현대무용협회를 발족하였다. 그러나 이 협회도 국내 무대 위주의 활동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국현대무용이 해외진출을 하는데 필요한 조직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문화공보부를 찾아가 한국현대무용의 해외무대 진출을 위해서는 사단법인단체가 필요하다는 취지를 밝혔다. 그러나 문공부 관계자들은 이미 예총 산하에 한국무용협회가 있고, 그와 별도로 한국현대무용협회가 발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무용단체는 허가할 수는 없다는 답변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해외무대에 진출하여 국위선양을 하는 것은 한국민속무용뿐이었고, 한국현대무용은 거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이종덕 씨를 만났을 때 한국현대무용도 해외진출의 길이 열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그는 문공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로 재직 중일 때였다. 

“한국현대무용의 해외무대 진출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국한된 한국무용만 국외활동을 한다는 것은 아주 시야가 좁은 생각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당연히 한국현대무용도 해외무대에 진출하여 우리 문화의 보다 발전된 수준을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종덕 씨는 한국현대무용진흥회의 창립을 적극 도와주겠다고 말하였다. 

당시 나는 이종덕 씨가 문화공보부에서 떠난 입장이기 때문에 그의 말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가 내 의견에 동조해준 것만으로도 눈물 나게 고마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 후 이종덕 씨는 당시 문화공보부의 김광식 문화예술국장을 직접 만나 한국현대무용의 국제무대 활동이 왜 필요한지 충분히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을 하였고, 아울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사단법인 한국현대무용진흥회가 창립될 수 있도록 좋을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동안 문화공보부에서 공연예술 분야를 오래 담당해온 이종덕 씨의 말이기 때문에,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문화공보부에서 한국현대무용진흥외 창립을 위한 사단법인 절차를 밟으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따라 1985년 동숭동 <샘터> 건물에서 사단법인 한국현대무용진흥회를 발족시켰다. 이종덕 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한국현대무용의 발전은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한국현대무용의 해외공연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것은 1972년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한국인 최초로 <육완순현대무용 공연>을 알면서부터였다. 등시 그 공연은 미국유학 이후 나의 미국무대 첫 데뷔 공연이기도 했다. 
 
▲ 왼쪽부터 이종덕 교수, 육완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한 사람 건너 김병익 문학평론가

1972년 그 공연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유렵으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첫 여행지인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버스 뒷 유리에 붙은 <한국민속공연단 공연> 포스터를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 버스를 쫓아가 자세히 일시를 살펴보았더니 한국민속무용단이 이미 공연을 마치고 다른 나라로 떠난 후였다. 

그 다음, 나와 남편이 도착한 나라가 프랑스였는데, 나는 파리에서 다시 <한국민속무용단 공연> 포스터를 보았다. 일정을 보니 공연이 현재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남편과 함께 낮 일찍부터 공연장으로 달려가 극장 건너편 커피숍에 앉아서 지루한 줄도 모르고 꽤 오랫동안 공연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공연단이 극장 앞에 모두 도착하는 것을 보고 뛰어나가 그들을 반갑게 만났으며 공연도 관람했다. 

공연 후 무대 뒤로 가서 출연하신 선배님과 단원들에게 많은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문공부의 인솔 책임자가 바로 이종덕 씨였다. 전부터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만난 것이 더욱 반가웠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날밤 잠을 설쳐가며 한국의 민속무용처럼 한국의 현대무용도 세계 여러나라를 돌면서 공연을 하여 국위선양을 할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한국현대무용이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그때 한국민속무용단 인솔자였던 이종덕 씨가 열어주었다는 것이 전혀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우리 문화의 해외진출이 얼마나 중요한가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일처럼 우리의 사단법인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창립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이종덕 씨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서, 그의 둘째딸 이상은이 이화여대 무용과에 입학하여 내 제자가 되면서부터 우리는 학부모와 자녀의 담당교수라는 더 친근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때 나는 너무 반가워서 이종덕 씨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이종덕 사장님! 집에서는 사장님 내외분이 상온이 부모지만, 학교에서는 내가 상온이 부모 역할을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자녀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자녀에게 관심을 갖는 부모들이 많은데, 무용의 경우 부모들이 대학에 다니는 자녀들에게도 신경을 써야 해요. 그러니 상온이의 발전하는 모습을 잘 지켜봐주세요.”

이종덕 씨는 내 말이 전적으로 옳다며 껄껄 웃었다. 

지금 다만 아쉬운 것은 이종덕 씨의 둘째딸이 대학 졸업 후 한국전통무용 쪽으로 전공을 바꾸었기 때문에 계속 현대무용 전공제자로 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니,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은 못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종덕 씨와 나는 그런 여러 가지 인연으로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둘째딸에 관한 것만 빼고는 내가 그에게 늘 도움을 받는 편이었다. 1993년에 대전엑스포 개막식 축하행사에서는 그가 단장으로 있던 서울예술단의 출연으로 내가 안무를 맡아 행사를 치렀으며, 세종문화회관 사장 시절에도 공연과 행사 관계로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항상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등 무용계 전반적으로 그가 힘을 쏟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사단법인 한국현대무용진흥회에서는 2001년에 제1회 Dancers' Heart Award상을 신설하였는데, 그 첫 번째 상을 이종덕 씨에게 수여하였다. 이 상은 무용계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문화계 인사들에게 수여하고 있는데, 참고로 제2회 수상자는 평화포럼 이사장이자 전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이셨던 강원룡 목사가, 제3회에는 극작가 차범석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 수상하였다. 

이종덕 사장, 아니 이제는 교수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그는 무대 뒤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예술에 대한 사랑이 여느 예술가보다 강하면 강했지 덜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그는 ‘예술’이라는 사래 긴 밭을 쟁기로 갈아온 뚝심 있는 문화행정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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