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끌어들일 줄 아는 매력 (17_마지막회)
  제8장 명사들이 보는 이종덕2

한상우(음악평론가)

내가 이종덕 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가형(가형)과 동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종덕 형을 형으로 예우한다. 

종덕 형은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표정이든 그 표정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미는 항상 변함이 없다. 종덕 형은 매우 바쁜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나타나야 할 곳엔 어김없이 나타난다. 종덕 형은 무뚝뚝한 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어수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짚어야 할 것을 놓치는 법이 없으며 확연한 결론을 낸다. 

종덕 형은 사람을 잘 사귀지만 분명한 사귐의 질서를 가지고 있으며 평가의 기준이 매우 엄하다. 종덕 형은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지만 술주정을 하지 않는다. 종덕 형을 우리는 문화예술계의 마당발이라 부르지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철저한 봉사정신으로 언제나 한발 뒤에서 무대를 지켜본다. 

음악평론가로서 음악계에서 활동하던 내가 종덕 형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공연윤리위원회에 관계하면서 부터지만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예술의 전당 사장으로 그가 취임하면서부터다. 나는 후원회에 관계하며 자주 만나게 되었고 후에는 예술의 전당 이사로 더욱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터득한 것은 전문가를 전문가로 예우한다는 사실이었다. 클래식과 관계된 것은 언제나 자문을 구했고, 조금의 사심도 없는 나의 생각을 그는 믿기 시작했다. 나는 술자리도 가지 않고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석에서 종덕 형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그나 나나 군더더기를 싫어하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성격이라 믿음의 관계가 더욱 공고해졌다. 

예술의 전당 사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후원회를 조직하고 또 기획 공연을 비롯한 자체공연 시스템을 정상궤도에 올려 자체 수입 규모를 70%까지 끌어올렸고, 국내외의 좋은 예술가들을 발굴, 무대에 세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종덕 형에 의해 후원회 부회장을 맡았고, 또 이사까지 지내며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이어지던 중 그가 창립회장을 맡은 서울 예장로터리클럽에 참여하라는 권유로 이번엔 예장로터리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며 회장직까지 지내고보니 일주일에 두세 번씩 얼굴을 맞대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예술의 전당 사장 임기를 마친 종덕 형은 팔자소관인지 이제 좀 쉬었으면 한다더니 여유를 부릴 새도 없이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 초대 사장으로 선임되었고, 나 또한 재단이사와 운영위원으로 참여, 인연의 끈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수십 년을 서울시 공무원들에 의해 안일하게 운영되던 세종문화회관의 재단화, 그리고 노조 설립 등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인사청탁과 이기적인 압력은 대단한 스트레스였으나, 결코 굴복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그의 추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 박용성 세종문화회관 후원회 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후, 후원회 임원들과 함께

종덕 형은 단순한 세종문화회관의 사장으로 머물지 않고 몇몇 친지들과 함께 광화문 문화포럼을 창설, 문화예술에 대한 심도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들었고, 많은 포럼가운데에서 문화예술을 중심으로 다루는 유일한 포럼으로 가꾸어오고 있다. 나 역시 운영위원으로 참여, 첫회부터 4년여를 사회를 맡고 있다. 

사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예술의 전당 사장으로 재직 시 후원회모임에서 내게 사회부탁을 한 후부터 종덕 형은 문화예술과 관계된 모임의 사회는 응당 내가 할 것으로 못 박고 있어 예술의 전당 후원회 사회를 시작으로 예장로터리의 특별 프로그램, 세종문화회관 후원회 모임 사회에 이르기까지 도맡아 했다. 

항상 객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 사람이 음악 외적인 일에 관계하며 사회를 본다는 일이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종덕 형과 이연을 맺은 것이나 인간적, 그리고 문화적 사건에 대한 믿음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며 이 또한 봉사의 일환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봉사란 자신의 것은 나누는데서 출발해야한다. 그런 점에서 종덕 형의 봉사정신은 가톨릭신자로서 성라자로마을의 후원회장은 물론 많은 곳에서 그의 봉사의 손길을 느낀다. 또 종덕 형은 지인들과 세계 최초의 낭만파클럽을 창립, 척박한 세상에서 여유와 나눔의 생활, 그리고 윤기 있는 삶의 주인공이 되자는 운동을 펼치며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고 나 또한 예외 없이 운영위원으로 각종 모임의 사회를 보았다. 

그뿐인가. 이제는 고인이 되신 무용가 최현 선생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허행초>라는 춤을 보고 만든 허행초 모임의 사회, 어쨌든 종덕 형이 관계하고 있는 모임에서 음약관련 자문과 사회가 필요할 땐 나를 부르는데 거의 10년을 이어오면서 변함이 없는 것을 보면 깊ㅇ은 신뢰를 바탕으로 꽤나 친한 사이가 된 것 같다. 

허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종덕 형은 언제나 고독을 달고 다닌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허한 구석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인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것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인지도 모른다. 

솔을 못하는 내가 종덕 형의 덕분으로 인사동의 <풍금집>, <이모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한남동 근처의 카페 <투모로우>, 그리고 <가을>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덕 형으로 인해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정을 나누게 된 각계각층의 지인들은 내 샹활의 활력소가 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항상 종덕 형이 버티고 있다. 

한국의 양대 공연장인 예술의 전당과 세종문화회관의 사장을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며 우리 시대의 뛰어난 문화기획가 이종덕 형, 아직도 펄펄한 기백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지칠 줄 모르게 활동하고 있는 형이 칠순을 맞는다니 믿어지지 않지만, 칠순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또 다른 역사가 종덕 형을 통해 펼쳐지리라는 기대를 가지며 글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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