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의 취직 걱정을 하며 나는 1960년 9월 28일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무렵은 4.19혁명 직후였기 때문에, 당시 학생들은 정치문제에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그런데 연세대학교 백낙준 총장이 정치적으로 외유를 하자, 학생들 사이에 민감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백낙준 총장의 외유로 인해 원일한 교수가 총장 자리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 여름학기에 졸업하는 학생들은 원일한 총장 서리의 이름이 들어간 졸업장을 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원일한 교수는 연세대학교를 세운 언더우드 박사의 손자이므로 충분히 총장 서리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당시 가장 존경받던 백낙준 총장 이름이 들어간 졸업장을 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고조되는 동안 드디어 졸업식 날이 왔다. 그러나 연세대학교 캠퍼스 내의 백양로에는 졸업식 보이콧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학생들은 졸업식장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원일한 총장 서리의 졸업장이 아닌 백낙준 총장 명의의 졸업장을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교문에 들어섰을 때 백양로에는 2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 모두 그날 졸업을 할 학생들이었으므로 대학 측에서는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졸업하는 학생이 280명이었으니, 거의 대부분 이 시위이 가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만약 졸업예정자들이 시위 현장을 떠나지 않을 경우 그날 졸업식은 거행할 수 없게 될 형편이었다.
당시 백낙준 총장은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우상이었다. 그렇게 존경해마지 않는 인물이 정치적으로 외유를 하게 되자, 학생들의 실망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우상이 무너진 것이다. 총장의 외유는 대학의 양심이 정치판의 구정물로 더렵혀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순수한 대학생들로서는 무너진 우상에 대하여 반대시위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재학생뿐만 아니라 졸업예정자들도 연세대학교 명예를 위하여 시위 현장에 나설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졸업식장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배수진을 치는 것은 당시 대학 내의 분위기상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현수막이 내걸린 백양로 한 복판에 연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졸업생 대표 한 명이 시위대를 향하여 졸업식장에 들어가지 말자고 선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졸업생 대표의 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연단으로 뛰어올라가 다음과 같이 외쳐댔다.
“여러분! 시위는 시위대로, 또 졸업식은 졸업식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일한 총장 서리의 졸업장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백낙준 총장이 주는 졸업장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졸업식을 거부하겠다고 하는 것은 명분이 안 됩니다. 원일한 총장 서리가 주는 졸업장도 엄연히 연세대학교 졸업장입니다. 명분이 없는 시위는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의 주장이 공허한 구호로 끝날 공산이 크다는 이야깁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졸업식장으로 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일장 연설을 하자, 갑자기 시위 현장은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졸업생 대표로 방금 연설을 끝낸 학생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를 기하여 나는 다시 외쳐댔다.
“여러분!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을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누구하나 손드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때 일부러 더욱 강한 어조로 주장을 밀고 나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작전이 먹혀들었던 것 같다.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나의 존재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광화문에서 거리패들과 어울려 다니는 나에 대한 소문은 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손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오늘 졸업식에 참여하겠다는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나는 연단에서 뛰어내려 곧바로 원일한 총장 서리를 찾아갔다. 원일한 총장 서리는 졸업식장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마친 채 백양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졸업예정자들의 시위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이제 학생들이 졸업식장으로 갈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원일한 총장 서리에게 이렇게 보고를 하였다.
그때 원일한 총장 서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표시로 오른쪽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곧바로 다시 시위 현장으로 달려가 학생들을 이끌고 당당하게 졸업식장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졸업식장으로 조용하게 줄을 지어 들어서자, 졸업식에 참석한 원일한 총장 서리 이하 교수들 모두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우쭐해지는 영웅심리가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 조용하게 졸업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