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울려 퍼진 사랑의 노래...

들판에 핀 하나의 작은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려 멀리멀리 퍼져나가 온 세상에 민들레꽃 향기를 전한다. 성 라자로 마을에서 시작된 나환자들을 위한 음악회 <그대 있음에>가 이제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벗어나 세계로 나가게 되었다.

2003년 12월 4일 김수환 추기경, 최덕기 수원교구장, 성라자로마을 김화태 원장 신부, 그리고 라자로마을 돕기회 봉두완 회장과 함께 나는 독일에 가서 세계 나환자들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에 참여하였다. 이때 나는 라자로마을 돕기 운영위원장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독일 나환자 돕기회 총재인 카르디날 레만 추기경과 함께 한국과 독일 합동으로 기획한 이 음악회에는 독일의 유명한 성악가들과 재독 한국인출신 성악가인 전지영, 박기천 씨등이 출연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나환자돕기음악회는 아주 유래 전에 한국의 성 라자로망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2003년에 드디어 세계적인 행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무릇 인생을 여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 역시 70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국내외 여행을 다녔으며, 그때마다 많은 점을 보고 느끼고 배웠다. 그러나 이번 독일 방문은 그 전에 다녀왔던 그 어떤 여행과도 달랐다. 우선 여행의 목적이나 일행의 면면이 그러했지만, 여행을 다녀오고 안 감회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이라고 했지만 기실 우리가 간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바로 독일 바스바덴 쿠어 하우스에서 열린 ‘세계 나환우를 위한 자선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유럽 라자로돕기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는 실질적으로 김수환 추기경과 독일 레만 추기경이 공동 주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의 작은 마을 라자로에서 시작된 행사가 어느덧 세계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성악가들과 재독 교포 성악가, 유럽에 흩어져 사는 교포들 상당수가 참석한 이번 행사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번 음악회를 통해 모아진 성금 전액은 베트남의 한 나환우마을 청소년 80여명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계 각국 나환우를 돕기 위한 행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독일 교회의 지원을 받아 나환우 복지활동을 전개하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세계 각국의 나환우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국의 성 라자로마을이 우뚝 서있다. 오래전부터 라자로마을 돕기에 작은 힘을 보태오던 나로서는 그저 흐뭇하고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이번 독일행사는 그런 외형적인 성과 외에도 내게는 정말로 커다란 은총과 축복의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가까이 접하기 어려운 김수환 추기경을 일주일 넘게 모신 것도 그러하지만, 여행 내내 우리는 추기경과 함께 매일 삼종기도를 드렸으며 추기경이 직접 주관하는 미사에 참석하였다.

늘 추기경을 흠모하고 우러렀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추기경의 말씀을 듣고 인간적인 체취까지 접하고 보니 그 은혜가 실로 새로웠다. 그런 추기경의 은혜로움은 독일 교포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 독일 프랑크프르트에서 세계 나환자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하고 / 왼쪽부터 필자, 김수환 추기경, 레만 독일 추기경, 봉두완 라자로마을 돕기회 회장

어느 교포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해외에 있는 교포사회는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안고 있게 마련이다. 그 주된 원인은 대부분 모국에 대한 그리움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다보니 인간적인 갈등도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갈등은 때로 모임을 위한 발전의 동인이 되기도 한다.

독일을 비롯한 인근 유럽의 교포사회에도 그러한 점이 전혀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모든 허물은 추기경의 강론 한마디에 봄날 눈 녹듯이 스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음악회 행사장에서 추기경 말씀은 물론이거니와 방문기간 중 주일 미사를 집전하는 추기경의 강론에서 서로의 아픈 상처를 보듬고 화합과 일치를 역설하는 말씀이 이어지자 미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리고 서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물게 하였다.

자선 음악회가 끝난 며칠 뒤 추기경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1박 일정으로 인접한 나라 룩셈부르크로 향했다. 버스로 약 네 시간 반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느 성지였다. 이곳은 룩셈부르크의 한 작은 마을로, 여덟 번에 걸쳐 성모님이 발현하신 아주 영성스런 곳이었다. 우리 일행은 성지순례를 마친 후 인근의 수도원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프랑크프르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종요한 일정을 어느 정도 마치고나서인지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일행의 표정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룩셈부르크까지 왕복 9시간의 여정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 되게 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버스 안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몇 사람의 순서가 지나고 추기경이 주위의 청을 뿌리치지 못해 노래를 부르셨다.애창곡 <애모>였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건너 우리 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노랫소리를 조용히 음미하던 어느 순간, 나는 가슴 저 밑에서 솟구쳐오는 벅찬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다며 절대자 앞에서 겸손히 고백하듯 노래하는 추기경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 어떤 성자의 모습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긍휼스러웠다. 추기경이 노래를 부르는 내내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내 영혼이 한없이 따사롭고 평안해지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사랑은 누구를 위해 마음을 나누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누군가에게 머리숙여 자신을 겸허히 내보이는 것 아닌가. 그것은 나환우를 돕기 위한 자선 음악회하고는 또 다른 사랑의 노래였다. 말 그대로 애모의 마음이 아닌가. 지금도 그때의 노랫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 신앙생활과 삶의 모습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한 이불을 덮고 자지 않았을 뿐이지 7박 8일간 추기경을 비롯하여 여러 사제들과 함께한 이번 여행에서 실로 커다란 영혼의 울림이 있었음을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남은 내 삶의 좌표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도 이제야 비로소 얻은 것 같았다. 그것은 낮은 곳에서 나를 필요한 도구로 써달라는 당신의 음성에 다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