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나누어 주는 사람 (3화)

꽃들은 저마다의 향기를 가지고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뿐만 아니라 아주 볼품없게 생긴 작은 꽃도 나름대로 향기를 발생하고 있다. 나는 꽃에서만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향기가 난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는 내면의 아름다움이다. 흔히 그것을 인간성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향기는 전달성이 강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법 없어도 살 사람’ 말을 자주 들으셨다. 술을 좋아하시지만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담을 될 정도로 실수는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는 참 어진 분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 2학년이 되던 해 6.25 전쟁이 터져 우리집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당시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중학교들은 부산으로 내려가 천막을 짓고 임시 학교에서 수업을 하였다. 내가 다닌 경복중학교도 부산 영도에서 임시 학교를 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아버지는 조폐공사에 다니셨다.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 마침 조폐공사가 동래에 옮겨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곳에서 간부로 근무하고 계셨다. 당시 우리 집은 구포에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경복중학교가 임시 개교를 한 영도까지 기차로 통학을 한 기억이 있다.

구포에 있는 집에서 여러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피난민으로 늘 북적거려 한 집에 살면서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고 지낼 정도였다. 언젠가 한번은 누님이 소매치기를 당하여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매치기가 한 집에 기거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일본 오사카 나카모도 초등학교 3학년 때 누님들과 / 왼쪽에서부터 셋째 누님, 둘째 누님, 필자, 큰 누님

누님의 말을 들은 식구들은 소매치기를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된다며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점잖게 말씀하셨다.

“시끄럽구나. 오죽이나 먹고 살게 없으면 지갑을 다 훔쳤겠니? 이번 일은 절대 소문내지 말고 없었던 일로 해라.”

이렇게 식구들에게 다짐을 준 아버지는 소매치기를 찾아가 오히려 생활비에 보태어 쓰라고 돈을 건네주었다.

“세상에나! 왜 그 나쁜사람에게 돈을 주는 거예요? 우리 애 지갑 훔쳐간 것을 어쩌구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따지고 드셨다. 어머니는 조용한 분이어서 아버지에게 뭐라고 의견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는데, 당시에는 딸이 잃어버린 지갑이 아까워서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갑이야 벌써 없어졌을 것이고, 내가 그 사람 사는 형편을 보니 당장 먹고 살 끼니도 없어 보이더구먼. 그 사람 얼굴을 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소. 원래는 착한 사람인데 험악한 세상이 그런 짓을 하게 만든 거지.”

아버지의 말씀에 어머니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도 그 소매치기에게 돈을 주었을 때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나중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보니 동정이 가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는 딸린 식구가 아주 많았다. 식구들 먹여살리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소매치기 노릇도 하게 된 것이었다.

어찌됐든 그 소매치기 사건을 통해 나는 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가 부산 조폐공사의 간부로 다니고 있어 우리 식구들을 생활 형편이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부산에 피난을 와 있는 처지라 생활에 쪼들리기는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물자가 부족했던 것이다.

▲ 경복중학교 1학년 재학시절

그런 불안한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는 남을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버지는 딸의 지갑을 훔쳐간 소매치기에게 오히려 생활비까지 보태준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아버지의 선행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더욱 감동적인 것은 아버지에게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돈까지 받은 그 소매치기가 개과천선을 하여 남의 지갑을 터는 일을 그만두고 취직을 한 것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개과천선을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작은 선행 한번으로 아버지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에게선 향기가 난다. 그 향기는 멀리멀리 퍼져 나간다. 아버지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 그 향기가 한 사람의 소매치기범을 정상적인 생활인으로 만드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처럼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아니 여러 사람에게 그 향기를 전하는 우편배달부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사람의 향기를 전하는 것은 바로 선행을 하여 남을 돕는 일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슴 속에 욕망만 가득하게 들어차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가득차서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것이다.

사람의 향기는 전염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받은 사람은 그 향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예술인들에게 그런 사람의 향기를 나누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내 가슴 속에 퍼져나간 향기가 예술인들의 가슴에 새로운 불꽃으로 타올라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사람의 향기를 전달하는 일을 하면 살고 싶다. 그것은 어린시절 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가장 고귀한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