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리더십은 그의 집안 내력이다 (8)
  제7장 명사들이 보는 이종덕1

신봉승 (극작가, 예술원 회원)

이종덕을 만나면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카리스마의 본뜻은 ‘신의 은총’이라는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지도력’이라는 말로 쓰이고 있다. 가령 대중이나 어떤 조직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고 자신을 우러르게 하는 강력한 리더십이라 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니다.

또 어떤 분야의 조직을 관리하고 일사분란하게 이끌어가는 사람을 말할 때도 달인(達人)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귀재(鬼才)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 말도 이종덕에게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딱 맞아 떨어지는 말이다. 적어도 문화행정(文化行政)이라는 분야에 적용하면 달인이나 귀재의 경지를 훨씬 넘어선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40여 년 전, 나는 공보부(지금의 문화관광부)에서 이종덕과 함께 공무원 노릇을 했다. 이종덕이 내가 있는 영화과에 들르면 영화관 초대권을 나누어주곤 했었다. 나는 영화과를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되었고, 이종덕은 문화공보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이른바 문화행정의 귀신이 되었다. 그가 공직에 있을 때에도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발휘하였지만, 공직에서 물러난 다음의 활동이 더 눈부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88서울예술단’이 그렇고, ‘서울예술단’이 그렇고, ‘예술의 전당’이 그렇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공연예술원이 그렇고, 세조문화회관이 또한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단체와 기관을 운영한 기간이 장장 20년이라면 이종덕의 카리스마를 최상급으로 평가해도 무방하다.

이종덕의 카리스마는 어디서 나오는가. 막스 웨버가 말하는 ‘카리스마의 저장량(Stock of Charisma)'을 우리말로 바꾸면 좀 애매해지지만 ’위신의 저장량‘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위신을 많이 저장한 사람이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되는 셈이다.

위신이 있다는 말은 꼭 벼슬이 높거나, 돈이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신은 본분을 지키는 사람에게 저장되게 마련이다. 그 저장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지도력을 오래 유지할 수가 있다.

역사상 그 이름을 빛낸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위신의 저장량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카리스마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았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서도 물론 ‘강력한 지도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무엇으로 대중이나 조직을 움직였을까.

우선 대중들이나 조직원들이 자신을 우러르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위엄(威嚴)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위엄이 가짜가 아님을 믿게 하는 신망(信望)이 있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므로 위엄과 신망을 하나로 묶은 ‘위신(威信)’이라는 말이 카리스마의 요건이 된다고 모면 어떨까.
 
▲ 신봉승 작가 [출처 ; 수필가 권남희]

조선시대에는 위신을 저축한 많은 공직자(公職者)가 있었다. 나는 그 많은 공직자 중에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사람들은 그를 말 할 때 ‘오리정승’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오리 이원익은 태종의 여덟 번째 양자 익녕군(益寧君)의 4대손으로 태어났다.

오리 이원익이 과거에 급제하여 공직에 나가서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을 때도 치적(治積)이 가장 훌륭했다고 평가된다. 관서(關西, 지금의 평안도)에 두 번 부임했는데, 평안도의 백성들이 그의 선정을 공경하고 애모하여 그가 떠난 다음에도 서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낼 정도로 한 몸에 존경을 받았다.

선조조(宣祖朝) 때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여주(麗州)로 돌아갔다. 그런 용단이 있었기에 광해군이 형님인 임해군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 이복 아우인 영창대군을 쪄서 죽이는 패덕에 관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의 곁에서 모든 권세를 독점하였던 이이첨 등이 선조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에 유폐하는 천하의 패덕을 자행할 때에는 그냥 있지를 않았다. 오리 이원익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는 처지인데도 광해군에게 강력한 소장을 올려 자전(慈殿, 인목대비)께 효성을 다할 것을 직언했다.

광해군이 크게 진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어찌 감히 이원익이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군부(君父)의 죄인(罪人)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하고 마침내 홍천(洪川)으로 귀향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은 군사쿠데타나 다름이 없었는데도, 새롭게 구성된 혁명정부에서는 오리 이원익을 다시 모셔와 영의정을 맡길 만큼 그의 인품은 크게 빛났다.
 
오리 이원익이 영의정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죽이려고 핏발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혁명을 성사시킨 공신들까지 광해군에게 사약을 내리기를 요구했다. 오리 이원익은 홀로 인목대비를 설득하고, 공신들을 타일러서 광해군을 죽음에서 구해낼 만큼 지도력이 탁월했다.

오리 이원익이 연로하여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서 금천(衿川)에 돌아가 초야에 묻혔을 때도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놀라지 말라. 이종덕은 오리 이원익의 자손(子孫)이다. 말을 바꾸면 그의 가문이 ‘카리스마’의 저장량을 끊임없이 축적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오리가(梧里家)의 위신과 명성이 고스란히 이종덕에게 전해지고 있다면 그의 카리스마, 그의 리더십이 탁월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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