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 1953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로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내가 미국에 올 무렵이던 1961년에는 82달러로 역시 빈국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마저 미국의 원조 덕분이었다. 그 무렵의 우리나라 수출액은 5천만 달러였으니 가히 경제규모를 알 수 있겠다.
박정희는 비록 총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가난한 나라의 청년들에게 자신을 잊고 몰두할 수출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제시한 대통령이었다. 1962년 정부 주도로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되고, 변변한 자원도 없는 우리도 해보자고 무역 진홍을 기치를 내걸었다. 수출 거리라고는 광물과 수산물밖에 없었다. 농촌 부녀자들이 누에고치에서 생산해낸 생사도 수출하며 1964년에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우리나라가 살길은 수출밖에 없었다.
나 역시 백범 주석의 가르침인 무역구국을 잊지 않았다. 힘이 들 때면 뉴욕박람회의 초라했던 조국의 모습을 되새겼다. 왕골 슬리퍼 같은 대부분 수제품의 전시물들, 다른 선진국에 비해 너무나 초라했던 조국의 모습이었다.
박정희와 그 시대는 우리 청년들에게 가난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살길은 수출밖에 없었다. 회사를 갓 설립한 나는 메이시백화점 최초로 한국산 가방을 수입하여 납품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하여 사업의 범위를 점점 넓혀 갔다. 부사장 킴도 열심히 뛰어 주었고, 내가 무역을 펼치는데 사람들과의 인연도 든든한 작용을 했다.
김영주 씨와의 인연도 특별했다. 그는 종로에서 훈장과 상패를 만드는 정금사의 부사장으로 근무했다. 고객이던 TWA사에서 승무원들의 가슴에 다는 은빛날개(Wing) 휘장을 의뢰받았다. TWA사는 날개 휘장이 탑승객 어린이 키트로서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기에 제작 주문을 의뢰했던 것이다.
날개 휘장을 제작하려고 한국을 방문해 실무자인 그를 만났다. 정금사의 기술로 휘장을 제작해 TWA에 무사히 납품했다. 이후에는 팬암(PanAm), 이스턴(Eastern), 유나이티드(United) 등 다른 항공사와도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김영주 씨는 우리 회사에 출장을 왔다가 납품을 무사히 마친 후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간 후 얼마 안 되어 정금사가 부도가 났다. 나는 평소에도 성실한 사람으로 생각을 해왔기에 그에게 닥친 불행이 남의 일처럼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회장님, 나름대로 회사를 살려보려고 했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회장님 밑에서 일하고 싶은데 도와주십시오.”
간곡한 간청에 그를 미국으로 초청해 영주권을 신청해주었다. 그는 우리 회사에서 배지 계통 상품 담당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그리고 식품점에서 매니저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실한 그에게 가게를 맡기자 오른팔을 얻은 느낌 이었다.
그는 열성을 가지고 일했고, 가게 매상도 나아졌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그는 아내와 아들 네 명인 가족을 불러들였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어두웠던 얼굴에도 어느덧 여유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후로 그를 통해 많은 친척들이 미국으로 와서 안정된 삶을 살았다.
그는 지병인 고혈압으로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 명복을 빈다. 한국에서 가장 힘든 순간을 맞은 그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함께 일하는 직원에 대한 경영방침이었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무역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나는 소매업에서는 손을 떼기로 했다. 그간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해 준 직원들에게 소매점 운영권을 넘겨주었다.
그간 정성으로 일해 온 김영주 씨에게는 식품점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가발 가게에서 매니저로 일한 한명숙 씨에게는 가발가게를 넘겨주었다. 액세서리 가게도 초창기에 고용한 태국 유학생인 찌뜨라가 워낙 손재주가 좋아 매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가게를 그녀에게 운영하도록 했다가 넘겨주었다.
내가 소매업에 손을 떼게 된 것도 사람에 대한 감사,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 때문인지 모른다. 사업 기반을 마련할 만큼 소매업으로 성공을 하게 된 원동력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속에는 인간에 대한 고마움이 있었다. 그간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성실하게 열심히 일해 준 덕분이었다.
소매업은 일하는 직원에 따라 사업의 성쇠가 좌우된다. 지역 내에 기반을 두고 하는 비즈니스이기에 평판도 좋아야 하고, 가게 이미지나 친절이 상품의 품질이나 가격보다 더 좌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같은 가격이면 친절한 가게로 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좋은 서비스란 고객의 요구를 잘 알아야 하고, 고객에 대한 정성이 깃든 태도를 말한다. 흔히 서비스라면 사람들은 일본을 떠올리게 된다. 용산 8회 졸업생들이 매년 한 번씩 갖는 동문회를 일본 후쿠오카에서 개최한 적이 있다. 그때 머물렀던 호텔에서 받은 환대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우리 일행이 오전 관광을 나갈 때면 환갑을 지난 백발의 호텔 지배인과 전 직원들이 나와서 90도 인사를 했고, 관광을 마치고 오는 일행에게 역시 전 직원이 나와서 인사를 하는 데는 두 손을 들 정도였다. 일본식 친절 서비스가 비즈니스 세계의 정석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정성은 고객감동 서비스라는 차원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
나는 고객과의 신용을 언제나 강조해왔다. 좋은 품질의 상품을 제공하는 기업, 그리고 신용을 지키는 진실한 기업이라는 것을 힘주어 말해왔다. 그것은 친절한 서비스라는 추상적인 개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영자의 사업 철학을 현장에서 적용하는 것은 바로 직원들의 근무태도이다.
그러한 나의 생각들이 잘 반영되고, 가게가 수익을 올리며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가게를 열심히 일구어준 직원들의 정성과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에게 좋은 가격으로 팔지 않고 그동안 헌신해준 직원들에게 가게를 넘긴 것이다. 그들이 충심을 다해 일한 그 보상으로 돌려준 것뿐이다. 진정한 기업정신은 인간을 키우는 것이라는 평소 신념 때문이었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그들 모두가 어려운 이민 생활을 견디고 가족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보람인지 모른다. 동포들의 모습이 그럴진대 내 조국을 위해서는 어떠했겠는가? 내 조국이 어떤 나라였던가? 36년간 말마저 빼앗기고 수많은 국민들을 품어주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 유랑하도록 만든 눈물뿐인 불쌍한 어머니가 아니던가.
내 조국은 전쟁이 키운 나라였다. 피압박의 제국주의로부터 살아났고 전란의 불바다를 건너 늘 죽음의 위기를 헤쳐 왔다.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고 이겨왔던 강한 나라였다. 혈혈단신 미국으로 와서 나는 맨주먹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듯 인생을 걸고 QMD를 창업해 한국 제품을 미국 시장으로 진출시키는 교두보(橋頭堡)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6, 7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한국경제가 놀라운 성장을 하게 된 이유도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은 바였다. 모국이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려고 나뿐만 아니라 미국의 수많은 교포들이 땀을 흘렸다.
나 역시 ‘무역에는 국경이 없다’는 업계의 지배적인 논리를 무시하고 71능하면 한국 제품을 수입하려고 애썼다. 그것이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명이고 아버님으로부터 무의식 속에 배워온 가르침이었다. 모국이 경제적으로 부홍하면 이 땅에 사는 우리의 후손들도 한국이라는 혈연의 땅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여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서 재외동포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인의 자긍심도 커져갔다. 일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한국과의 무역을 통해 한국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해오며 얻은 큰 보람과 자부심이다. 한국이 경제 부국으로 성장하는 것이 나의 숙원이었고 선친의 유지였다. 오랜 세월 이국땅에서 살면서도 모국에 대한 애국심은 더욱 깊어진다.
모국인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남은 생애를 바치고 싶고, 나의 후세들 역시 선대(先代)의 마음이 담긴 무역구국의 정신을 이어나가기를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