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학교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저학년들이 따라 부르고 있었다. 사상교육을 받으며 아이들은 한여름 나무그늘의 매미처럼 노래를 따라 불렀다. “태백산에 눈 내린다. 총을 메어라 출진이다…”로 시작되는 「빨치산의 노래」도 가르쳤다.
인공치하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먹을거리였다.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조금 남은 쌀이나 보리쌀로 죽을 쑤었다. 그마저도 바닥을 보이면 채소를 사다 쌀이나 보리 혹은 밀가루를 조금 넣고 풀떼기를 쑤어 먹기도 했다. 난리 통에 어 린 나이지만 배고픈 티도 못 내고 함께 견디며 참았다.
전쟁이 주는 고통은 나에게 인생을 일찍 깨닫게 해주었다. 처절한 생존, 그 바닥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전쟁은 은연중에 가르쳐주었다. 우리 세대가 악착같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해외에서 살아남은 원동력이 이때 키워진 성싶다.
여름은 무덥고 길었다. 인민군들은 여전히 집으로 찾아왔고, 여름 내내 아버님은 지하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은신해 계셨다. 혹독한 여름 동안 숨 한 번 제대로 못 쉬고 밤낮 숨어 계셨던 아버님의 절망이 내게도 큰 고통이었다. 아버님이 자유롭게 다시 밖으로 다니실 날만 눈 빠지게 기다렸다.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가족들이 석 달을 숨죽이며 숨어 있는 동안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왔다.
서울을 점령한 후 인민군은 8월 초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 미군과 대치상태에 빠졌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 열한 전투였던 경북 왜관 일대에서 벌어진 다부동전투는 남한이 적화되느냐의 갈림에 선 최후의 일전이었다. 낙동강 전투에서 서로가 밀고 밀리는 교착전이 계속되고 있을 즈음 미 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적의 후방을 공격해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력과 장비를 섬 멸하는 전략인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1950년 9월 15일，먼 거리였지만 인천 앞바다에서 함포를 때리는 포성이 은은히 들려왔다.
“곧 서울이 수복될 것이래.’ 소문이 무성했다. 인민군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인천에 맥아더 장군이 해병대를 이끌고 상륙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 집은 미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인천 상륙의 성공 소식을 접했다. 라디오에서 소식을 들은 날부터 밤새도록 조명탄이 밤을 밝히고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마침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우리 가족은 다다미 바닥을 걷고 나왔다. 석 달간 살았던 지옥에서의 탈출이었다. 용케도 숨어 살았던 사람들이 어둠을 걷고 나와 국군과 미군을 환영했다. 9월 28일 서울탈환 환영대희가 중앙청에서 열리면서 시민들의 환영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집에서 서울역까지는 가까운 거리여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도중 미군의 탱크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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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국군 ⓒ LIFE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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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철로에서 미국 공군의 기관총탄에 죽을 뻔했던 내게 그때의 미군은 지하에서 구출해준 해방군이었다. 나는 미군에 대해 대단히 호감을 느끼며 미국이라는 나라를 동경했다.
비포장 국도에는 연일 군용 지프, 탱크가 북상하고 야포를 매단트럭을 탄 군인들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북진했다. 국군과 UN군은 B-29를 앞세운 미 공군의 위세에 힘입어 평양으로 진격해 갔다.
라디오와 신문에서는 연일 평양 입성과 북진통일의 염원을 담은 승전보를 보도했다. 아버님은 북진하던 군인들을 따라 고향인 평양으로 떠났다. 하지만 압록강까지 밀리던 북한은 중공군의 지원을 요청했고, 인해전술로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밀려 들어오면서 유엔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자 강경론자인 맥아더 총사령관과 극동에서 또다시 세계대전의 기폭제를 막으려 했던 트루먼대통령과 대립으로 맥아더 장군은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는 의회 에서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OI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유명한 말을 역사에 남겼다.
12월 세모가 다가오는 서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고, 몹시 추웠다. 함박눈이 밤새 내려 발목이 푹푹 빠졌다. 그리고 숱한 ‘전쟁루머’가 퍼졌다.
“청장년들은 의용군으로 전선으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총살당한다.”
“군인과 경찰 가족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영악해져 있었다. 서울에 남아 있다가 부역을 하든지 인민군이 되어 전선으로 끌려가거나 납북 당한 일도 보았다. 정부의 말을 믿을 바보 같은 사람은 없었다. 언제 서울을 떠나느냐의 결정만 남아 있었다.
서울이 위험해지자, 시민들은 인공 치하 3개월의 모진 고통을 견뎌낸 대가로 돌아온 잔류파라는 손가락질을 다시 받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웃들이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한두 집씩 빠져나갈 때 평양을 다녀온 아버님이 전방 분위기를 일찍 파악했기에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짐을 꾸렸다.
“피난 가야 한다.’ 필요한 가재도구를 아버님께서 빌려오신 트럭에 실었다. 당시 육발이라고 부르거나 지엠시라고 불렀던 GMC 트럭에 올라탔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쳤다. 이불 흩청을 뜯어서 임시변통으로 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도록 덮개를 씌우고, 우리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맹추위를 견뎌야 했다. 그래도 세간을 지고 걷거나, 기차 지붕에 올라탄 채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은 형편이었다. 서울의 기차역들은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짐 보따리를 잃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군중 속에서 아이의 손을 놓쳐 찾고 있는 엄마, 엄마를 잃고 찾아 헤매는 아이의 울음소리, 날씨보다 더 매섭고 각박한 인심뿐이었다.
피난 행렬은 남행을 거듭했다. 고향을 등지고 남부여대해서 사람들은 길고 먼 고통의 피난길을 가고 있었다.
부산을 앞둔 낙동강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밤에 낙동강 다리가 끊어진 터라 후진을 하다가 논두렁에 처박힌 트럭이 뒤집혔다. 불도 없이 깜깜한 밤중에 차를 정비할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근처 농가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 농가도 이미 피난민들로 꽉 들어차서 발을 뻗고 잠조차 자기 힘들었다. 새우잠을 자다가 몇 번이나 깨곤 했다. 그나마 서울보다 경상남도는 추위가 덜했다.
다음날에야 우리는 겨우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은 이미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낮은 야산은 죄다 판잣집으로 뒤덮였다. 말 그대로 국토의 끝인 부산은 도시 자체가 거대한 피난민 수용소였다. 경상도 말씨, 충청도 말씨, 함경도와 평안도 말씨 등 전국의 다양한 억양이 도시를 뒤덮었다. 다양한 피난민들을 부산은 너그러이 품어주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님께서 알고 지냈던 서울 석유회사 김 사장님이 살던 초장동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부산 서구의 초장동은 아주 남쪽에 붙어 있는 동네였다. 초장동 언덕에 서면 푸른 물결이 잔잔히 일며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부산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부산과의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김 사장님의 아들인 김희준과도 친해졌다. 그때 부산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 댁에 방 두 개를 얻어 피난살이 신세를 지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부산에서 피난 시절을 보내며 봄을 맞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토성 공립국민학교에 편입했다. 1915년 부산 제6 소학교로 개교한, 유서 깊은 학교였다. 마지막 학기를 다니며 졸업반을 보낸 인연을 맺었다.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오면서 인간의 삶이 주위환경에 의해 얼마나 불행해 질 수 있는가를 수없이 목격했다. 전란의 한가운데서 굶주려 죽거나 총에 맞아 죽어 가는 아이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모든 자들의 죄를 자복하고 싶었다.
전쟁이 끝나고 거짓말처럼 평화가 왔다. 그러나 여전히 한 끼를 때우는 것조차 힘겨운 가난의 그림자에 갇힌 이웃을 돕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시대의 비극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