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남북왕래와 개전(開戰) (9회)
  제2장 남쪽 나라로

어머님을 모시고 38선 지대까지 가는 길을 묻고 물어서 찾아갔다. 지금은 북한 땅이 되었지만 당시 그 지역은 지금과는 달리 군사 분계선이 있거나 완충 지대가 있거나 철책이 쳐져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쌍방의 국경 경비대가 산발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그때 어머님께서 북으로 다시 넘어가려는 지대는 자그마한 야산 하나를 넘어가면 북한 땅이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운이 나빠 붙잡히면 끝장나는 곳이 바로 38선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님의 그 갸륵한 자식을 위한 정성을 알아보시고 한 번의 기적을 내리어 주시었다. 그때가 오후 3시경이었는데 난데없이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야말로 10미터 앞의 지척을 분간 못할 정도의 날씨로 변하였다.

어머님은 비록 눈을 맞게 되어 약간 불편은 하시겠지만 그 눈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여러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사선을 넘게 되어 그 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감사하면서 38선 고갯길을 타박타박 무사히 걸어가시면서 점점 자취를 감추시었다.

나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눈 내리는 먼 하늘만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려 그 근처에 있는 산막 같은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눈도 피할 겸 그보다도 어머님을 보내고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아 아무 곳에서나 하루 밤을 쉬어 가고 싶은 심정에서 나의 사정을 말하고 하룻밤 숙박을 청하였다.

그 집 남자 주인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곧 돌아온다는 것이고 부인 혼자만이 5살 정도의 아기하고 있으면서 나의 유숙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얼마간의 숙박료도 정하였다. 당시 38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투숙하는 것은 상례로 되어 있는 듯 했다.

그 집 구조는 아래 위 단 두 칸 방과 부엌만으로 되어 있는 단채 오막살이 초가집이었다. 나는 정해준 윗방에서 잠시 쉬면서 계속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면서 홀로 외로이 가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그리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그 집 아기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반가워하며 그 아기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 아기는 잠시 후 대뜸 나에게 하는 말이 퉁명스럽게 “너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애는 아직 철이 없는 어린 아기이고 또 내가 낯선 남자이니까 무심히 하는 말로만 생각하고 나는 그 아기에게 더 다정한 말로 “아가, 그러지 마. 내가 재미나는 이야기 해 줄게. 그리고 이 아저씨는 너희 집에 돈도 주고 하룻밤을 자고 가려는데 왜 그래.”하며 달래 보았으나 그 애는 또 다시 하는 말이 이번에는 자기 손을 자기 목에다 대고 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며 “너 안 가면 우리 아빠가 와서 이렇게 할 거야”라고 하는 것이다.
 
▲ 1945년 8월 이후 미국과 소련의 군사분계선으로 그어진 38선 모습 / 분단 초창기만 해도 남북한 사람들은 경계병의 감시를 피해 몰래 왕래하곤 했다.(사진=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그 말에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 불과 5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애가 무얼 알아서 그렇게 사람의 목을 베는 시늉을 하기까지 하며 나를 가라고 하겠는가. 이는 분명 어느 땐가 그런 장면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직감이 되었다. 이 적막한 외딴 집에서 때로는 그러한 참변을 당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나에게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눈앞에 닥친 것만 같았다. 이제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는 주인 남자가 오기 전 이 집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라 나는 신발을 어떻게 신었는지 말았는지 문을 박차고 나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부인에게 나는 급한 사정이 있어 오늘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그 쏟아지는 눈길을 헤치며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도 내 머리 속에는 그 주인 남자가 곧바로 뒤를 쫓아오는 것만 같은 환상뿐이었다. 그곳에서 옹진읍까지는 약 30리 정도 되었는데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단숨에 달렸던 것이다.

그 일을 다시 돌이켜보면 볼수록 분명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아기를 통하여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신 것이라고 확신하며 지금도 50년 전 일이 생생하게 나의 뇌리 속에 기억되어 있다. 다시 한 번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학교를 졸업하고 약 3개월간 모교인 서울 음악전문학교에 나가 강의를 하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후배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계중고등학교에도 계속 출강을 하였다.

숙소는 원효로 용산 경찰서 근처에 하숙을 정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의예과를 다니다가 월남하여 당시 중앙여고 서무과에 근무하는 박삼열이라는 사람이 같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1950년 그때가 6월 27일 밤 자정이 조금 지나서였다. 박 선생은 깊이 잠들어 있는 나를 강 선생, 강 선생 하며 깨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2층 뒤 창문 쪽으로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올라가 뒤 창문 밖을 내다보라는 것이다. 저 멀리 밤하늘에는 붉은 불덩이가 왔다 갔다 하며 꽈르릉 꽈르릉 하는 것이었다.

“강 선생, 큰일 났어. 저것은 분명히 전쟁이 일어난 거야. 북한 인민군이 서울 근교까지 쳐들어온 것이 분명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하며 태산 같은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아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떤 뾰족한 방안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날 밤 우리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아침 일찍 원효로 큰 길가로 나가 보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탱크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탱크 한 대가 길 한가운데로 달려오고 있었다.

 
  음악수업 (8회)
  인민군 수중에서의 열흘 여 서울생활 (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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