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린도 피난생활 (15회)
  제3장 한국전쟁 속에서

당시 섬을 피난지로 택한 이유는 전쟁은 본토에서 이루어질 뿐 섬에서는 아직 격전지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섬으로 건너온 우리는 우선 거주할 방을 얻어야 했는데 방 얻기가 그리 쉬운 이른 아니었다. 왜냐하면 섬사람들의 생활이 본래 여유가 없기도 하지만 많은 피난민이 한꺼번에 몰려와 더욱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어느 집 문간방 하나가 있다고 하여 빌리기로 했는데 방 크기가 돗자리 하나 반 정도의 아주 작은 방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우리식구 무려 9명이 자야 할 형편이었다.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에는 서로 발과 머리가 어긋나게 누워야 했고, 혹시 밤중에 변소라도 가기 위해서 일어나면 제자리에 들어가 누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방마저도 2개월 후 봄철이 돌아오자 주인은 감자 싹을 키운다고 방을 비워 달라고 해 하는 수 없이 딴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이사하려는 집 방은 지금까지 사람이 거처하지 않던 방이어서 엎친 데 덮친다고 온통 곰팡이가 끼고 매우 불결한 상태였다. 그래도 하는 수 없이 옮겨 다녀야 하는 피난민 신세를 그 누구에게 호소를 해야 할지 한스럽기만 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식생활만은 가지고 온 직물류를 조금씩 팔기도 하고 또 쌀과 교환하기도 하여 해결해 나갔던 것만은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얼마동안 지내다가 그 피난생활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보기 위해 용호도에 가서 잠시 동안 있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안 동생과 희광이를 제외하고는 아내와 아이들 모두가 그곳에서 만연하고 있는 발진티푸스 전염병을 앓았거나 아직도 앓아누워 있는 형편이었다.

 나는 다행인지는 몰라도 딴 섬인 용호도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전염병을 피하게 된 데다 우리 가족들의 인명 피해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천만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다른 가족들 중에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던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 후 우리는 가족들의 병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그곳 창린도를 떠나 용호도로 피난지를 또 옮겼다.

 해군 보도 대장으로

용호도는 창린도 보다는 면적은 작지만 모든 면에서 요충지로 되어 있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우리 남한의 현병파견대가 주둔하여 치안을 담당하기까지 하던 곳이다.
 
▲ 창린도 피난 생활 당시 민간인 군속 해군 보도대장으로 활동했다
  
▲ 민간인 군속 해군 보도대장으로 임명되어
 
용호도에는 더욱 많은 피난민과 유격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어떤 피난민 한 분이 라디오를 하나 가지고 나왔다고 하여 나는 그것을 구입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과 같이 배터리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기로만 듣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곳 용호도에는 전기시설이 안 되어 있어서 고심을 하고 있는데 마침 어느 피난민이 발전기를 가지고 나왔다고 하기에 그 발전기를 또 사 가지고 발전을 해서 방송을 청취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낮 시간에는 그 발전기로 쌀을 정미하는데 이용하여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와 장기적인 효능을 노렸던 것이다.

이렇게 구한 라디오를 통해 특히 우리나라에서 방송되는 전선의 소식을 비교적 정확하게 청취할 수가 있었다. 이 귀한 소식을 나 혼자만 듣는 것보다는 이 섬에 있는 모든 피난민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해 낸 것이 그 뉴스를 청취해 필경으로나마 등사를 해 나누어주기로 하였다. 그때 그 뉴스지는 신문과 라디오 방송마저 없는 그곳에서는 정말 귀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등사한 뉴스지를 몇 달분 치를 모아 가지고 백련도에 있는 우리 해군 서해안도서사령부에 찾아가 이런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후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해군에서는 쾌히 승낙하고 참으로 장한 일을 한다고 하며 나를 민간인 군속 해군보도대장이라는 큼직한 명칭을 하나 부여해주고 또 쌀도 20포대나 원조를 해 주었다.

그때 그 쌀을 배에 싣고 돌아와 아주 유효하게 사용한 바 있고 또 우리가 용호도에서 철수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면서 외로운 피난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이별과 동생의 만남 (14회)
  보도대장과 음악발표회 활동 (16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