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 유원진에서 중국 봉천까지 (제1회)
  제1장 박천에서 만주와 신천으로

나는 내 생애를 대체로 세 번의 큰 변화를 이루면서 살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마치 애벌레가 허물을 벗으면서 전혀 다른 형태의 나방 등으로 변하며 살아가는 자연의 법칙과 같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세 번의 대 이동과 나의 운신이 너무나 판이하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인생여정을 보면, 대부분이 많은 풍파와 역경,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것처럼 내가 걸어온 길도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의 길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박천군 양가면 봉산동(平安北道 博川郡 兩嘉面 鳳山洞)117번지(원적지) 이었지만 6세 때 부모님을 따라 낭림산맥 첩첩산으로 둘러싸인 약 200호 정도의 산중 마을 도시 평안북도 희천군 신풍면 유원진(平安北道 熙川郡 新豊面 柔院鎭)이라는 두메산골로 가게 되어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내며 성장하였다.

부친께서 그런 곳을 왜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 약 10년 동안 사시면서 적수공권으로 시작한 상업(잡화상을 겸한 직물상)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재산도 시골부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어 지방 유지의 칭송도 받으며 지내시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나의 아버님의 친 형님이신 큰아버지께서는 그곳까지 찾아와 신풍에서 약 30리 쯤 떨어진 명달골이라는 명달광산에서 금광을 하신다고 하여 부친께서는 그 뒷바라지와 채무보증 등을 한 것이 그만 잘못되어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고 결국 산수 수련하고 인심 좋은 그 고장을 떠나야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10년간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모두 날려 버리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난 곳이 산 설고 물 설은 머나먼 이국땅 게다가 말과 풍습까지 다른 만주 땅 지금은 심양(瀋陽)이라고 부르는 봉천성(奉天省) 서풍현(西豊縣) 어느 농촌 마을이었다.

그곳에 가셔서는 중국사람 수명을 거느리고 농사를 지으시면서 또 다른 인생의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시었다.

나는 그때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을 잘 몰랐지만 부친의 활동성은 참으로 비범하게 보였다. 부친의 교육정도는 한학을 조금하신 정도였는데도 손재주가 좋으셔서 무엇이든지 만지면 못하시는 것이 없고 상업을 하시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주판도 잘 놓으셨고 장부 기록도 잘하신 줄로 기억된다.

만주에서는 대여 받은 수 천 평의 농지에 논농사를 지으셨다. 봄철이 돌아오고 논에 모를 심을 때가 되어서 일손이 모자라자 나를 그 곳에 들어오라고 편지를 보내셨다. 그때 내 나이 16세로 아직 모든 면에서 미숙한 연령이었지만 나 혼자서 편지에 적힌 주소 한 장만을 들고 만주땅을 찾아 떠났던 것이다.

만주땅이라면 우리가 다 아는바와 같이 고구려 때에는 우리 영토이었건만 언젠가 중국 영토로 변했고, 일본이 청일 전쟁으로 식민지화 한곳으로 많은 일본사람들과 우리 민족이 이주를 해 가서 개척과 번영을 시키던 곳이다. 이러한 곳이기는 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혼자서 찾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만주 봉천역에 도착하여 역전 광장에 내려 보니 모두가 중국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담요를 둘둘 말아서 어깨에 메고 다니는 풍습(어디서든지 담요를 펴고 손쉽게 잘 수 있음)이 그런 광경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두렵고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봉천에서 서풍현 시골 마을까지는 마차를 타고 가야 했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모르는 어린 소년인 내가 어떻게 해서 마차를 타고 부친이 계시는 서풍현 시골마을 그곳까지 갈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하나의 기적 같기만 한 일이었다.

부친을 만나 약 6개월간 농사일을 도우며 지냈다. 나는 그 동안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쉬운 생활 용어는 할 정도가 되어 중국 인부들과의 대화는 내가 맡아 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어느덧 가을이 오고 추수의 계절이 되었다.

그런데 그곳의 치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소위 마적단이라고 부르는 불법 단체들이 공공연하게 부락마다 찾아다니며 자기들이 필요한 식량과 내복, 신발 등의 수량을 정해 언제까지 어디로 보내라는 통지문을 보낸다.
 
▲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 일대에서 서식하던 마적단들의 모습

부락민이 이 통지문을 들고 그곳 촌공서(경찰 지서)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 촌공서에서는 우리는 모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고개를 설레 설레 저어대는 것이 그곳 치안상태였다.
 
촌공서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고는 하나 마적단의 세력에 대항하여 개입을 한다면 그 촌공서는 무자비한 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만일 그 요구를 거절한다면 그들은 그 부락의 어느 귀한 집 자식 하나를 납치하여 가고 그래도 응하지 않으면 귀를 잘라 보낸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나도 한두 번 겪은 일이었지만 밤이면 동네 개들이 몹시 짖어대는 그 다음날이면 어느 집 소를 끌어갔다는 등의 소식이 들리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하겠다.

어느 날 밤 부친께서 고이 잠든 나를 깨워서 일어나 보니 급한 목소리로 빨리 옷을 입고 문밖으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래 아직 잠이 깨지도 않은 눈을 비비면서 옷을 주워 입고 부친을 따라 집 모퉁이 굴뚝 옆 외진 곳에 가서 숨을 죽이고 밤을 지새웠던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지만 옆집 개가 하도 요란하게 짖어대서 금시라도 마적단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위험을 느끼게 하는 것이 그곳의 풍경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아버님의 권유도 있고 해서 그전에 살던 곳 어머니가 아직 계신 신풍으로 다시 나오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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