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회)
  제1장 박천에서 만주와 신천으로

기차를 타고 봉천에서 안동(지금은 단동으로 개명)까지 오는 동안 그 넓고 넓은 광활한 만주 평야에 고개를 숙이고 하늘거리며 서 있는 수수 이삭들의 관경은 풍요로우면서 대륙적인 면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곳 만주 벌판의 농작물이 대부분 수수밭이었다. 그러기에 그 당시 중국인들의 주식은 수수쌀밥으로 이것을 멀건 죽 같은 물에 말아 건져먹는 것이 그들 농촌사람들의 식사방법이었다.

나는 그 길로 희천 신풍까지 돌아왔고 부친께서는 1년 농사를 다 마치시고 다음해에는 서풍현 시내로 나오셔서 1년간 벼 무역상을 하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부친께서 그때에 동봉하신 사진을 나는 초상화로 만들어 지금까지 고이 모시고 있다.
 
▲ 일제시대 특급열차에 해당하는 경의선 히카리

그 후 신풍으로 돌아와 만주로 가기 전에 정혼했던 지금의 아내 이춘명(李春明)과 결혼을 했다. 결혼한 날짜는 눈이 펄펄 날리던 음력 12월 12일이었다. 눈을 맞으며 수행원과 같이 30리나 되는 처가까지 말을 타고 가던 생각이 지금도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내 나이 16세였고 아내의 나이는 17세였다.

아내의 본가는 신풍시내에서 약 30리 떨어져 있는 유명한 유황온천인 신풍온천 근처 남동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아내는 아버지 이인호(李仁浩), 어머니 김신자(金信子)의 사이에서 1남 3여중 막내딸로 전형적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장인은 약간 체소한 편이나 혼자서 곰을 창으로 찔러 잡을 정도로 담대하시면서도 인자하시었다. 내가 가끔 처가에 가는 날이면 손수 양봉으로 얻은 꿀을 떠다 주기도 하고 감자며 옥수수를 화로에 구워서 주고, 또 직접 농사를 지어 만든 메밀쌀로 만든 손국수를 동치미 국물에 말아 주는가 하면 그곳 특유의 음식인 기장 쌀밥도 지어 주는 등 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열 살 정도 연장이신 처남(李春風)은 동리에서 인심 좋고 인정 많고 또 효자로 소문난 분이었다.

당시 결혼 풍습을 소개한다. 결혼하는 과정은 쌍방의 부모가 중매인의 말에 의해 의사를 결정하고 당사자 신랑 신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정혼을 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가가는 날까지도 신랑 신부는 서로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정혼했다는 말을 듣고 신부를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에서 신부집 근처를 지나가는 기회가 있어 혹시나 하고 엿보았으나 허사가 된 일이 있다.

약혼식이라는 것도 지금과는 달리 사주를 써서 인편에 보내는 것으로 약혼이 성립된다. 결혼 당일에는 신랑이 수행원과 같이 신부집으로 가서 어떤 식을 올리는 것이 아니고 신부집에서 준비한 큰 잔칫상을 받는 것이 즉 결혼식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역시 신부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저녁이 되어 신랑이 신방에 들면 그때 신부가 들어와 비로소 처음 상면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잠자리에 드는데 짓궂은 동네 사람들이 창호지로 바른 창문을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는 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되어 있다.

다음날에는 동네 청년들은 신랑을 달아 먹는다고 신랑의 두 발을 묶어 거꾸로 달아매고 발바닥을 나뭇가지 등으로 치며 괴롭히는 것이 또 하나의 풍습이다. 그리고 3-5일간 신랑이 신부집에 머무는데 처가 친척들은 그 시기를 이용해서 반살 기를 차리고 신랑 신부를 초대하고 신랑신부는 다니며 인사를 드린다.

그때가 눈이 많이 쌓인 겨울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썰매 같은 소 발구를 신부와 같이 타고 두터운 이불을 쓰고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신랑은 집으로 먼저 돌아가고 신부는 약 10일 후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시집을 오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결혼한다는 말보다든 시집장가 간다고 하였던 것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1년 정도 되어서 부친께서는 만주에서 하시던 벼 무역상도 정리를 하시고 환해도 신천으로 나오셔서 상업을 또 시작하시었다. 그리고는 비록 자그마한 초가집이지만 살림집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 가족들을 그곳 신천으로 데려가셨다.
 
▲ 부친 / 부친은 상업에 수완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 우리 가족이라면 나보다 여섯 살 연상이신 누님 탄실(灘實)은 이미 신풍에서 매부 김홍석(金弘錫)과 결혼을 하여 출가한 상태였기에 남은 가족은 어머니 장선화(張善嬅)와 나 그리고 아내 이춘명(李春明) 세 사람 뿐이었다.

신천은 황해도에서도 곡창지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주위에 있는 신천 온천지대를 비롯하여 재령평야와 안악 평야 등은 우리 남한의 호남평야와도 유사한 지대라고 하겠다. 나는 이곳에서 약 8년 동안 청년기를 보냈다. 비록 짧은 동안이지만 왜정 말기 소위 태평양전쟁과 8‧15 조국 해방의 기쁨, 곧이어 공산 정권 하의 억압 생활 등 참으로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부친을 도와 상업에 종사하며 지내던 시기였다.

왜정 말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던 일은 전쟁으로 모든 생활 필수품의 품귀 상태는 물론이고, 포탄을 만든다고 유기 그릇까지 공출해 가고 젊은이들은 징병이니 학도병이니 또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하든지 아니면 징용 노무자로 끌어가고, 미혼 여성은 소위 위안대로 뽑아 가는 등 어느 가정이고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고 매일매일 불안 속에서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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