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수업 (8회)
  제2장 남쪽 나라로

세 자녀의 아버지로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입학을 한 26세의 만학도였기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러한 노력과 성실한 태도의 결과로 2학년 때부터는 학년 반대표가 되었고 또 학장이 어떻게 보았던지 지금은 동국대학교 부속 건물이 되었지만 당시 장충동에 있는 고계 중고등학교 음악강사로 추천을 하여 주어서 재학 중에 출강을 하게 되었고, 3년 졸업 후에는 모교 교수로 취임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재학 중에는 지금도 많이 연주되고 있는 유명한 오페라 테너 아리아는 대부분 습득할 정도에다 전공과목과 음악 이론 등은 항상 A학점이었고 부전공으로 한 화성학과 작곡법도 좋은 성적을 받는 등 공부에만 충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때의 졸업생 명단과 교수 명단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데 그 졸업생 명단에는 테너 안형일, 지휘자 홍연택, 문교부에서 일한 정세문 등 우리 음악계의 정상급 음악인들을 배출하였고 교수진으로는 현재 음악계의 최고 원로이신 이승학 선생님을 비롯해서 당대의 명테너 임만섭 선생 그리고 작곡계의 거성 박태준 박사 등이 있었다.
 
그때 나의 생활 면은 내가 단신으로 월남해 와서 있었기 때문에 학비나 숙식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고학 생활을 해야 했다. 숙소는 용산 도화동에 있는 덕영학사라는 곳이었다. 그곳은 부흥 강사로 유명한 황금천 목사님과 그 외 목사님 몇 분께서 2층으로 된 적산가옥 하나를 인수해 가지고 월남하여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운영하는 일종의 기숙사였다. 숙식비라고 해서 매월 약간씩을 받기는 하였으나 실비도 안 될 정도였고 식사는 학사에서 일부는 제공했으나 일부는 자취를 해야 하는 등 그야말로 자선사업의 일종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지낼 때 있었던 일화 몇 가지를 적어 본다. 조그마한 방 하나에 미군 야전용 침대 하나와 허름한 작은 책상 하나 그리고 한쪽에는 취사도구 약간과 전기곤로 하나가 나의 생활 도구 전부였다.

나는 아침 새벽에 일어나 냄비에 아침과 점심 두 끼 분량의 쌀을 곤로에 올려놓고 밥이 끓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하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어 밥이 타는 냄새에 눈을 떠보면 냄비의 밥이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밥을 지을 시간이 없어 그 탄 밥은 아침에 먹고 그래도 조금 덜 탄 밥은 도시락 통에 담아 가지고 학교에 갔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당시 서울음악전문학교 학보

그리고 저녁은 대개 학사에서 주는 밥을 먹는데 밥은 흰쌀밥이었지만 국은 콩나물국인데 멀건 소금국에 콩나물을 꼭 다섯 줄기 정도가 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아무런 불평 없이 그저 고맙기만 하던 그 시절이었다.

또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한 고향에서 온 친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친지는 학교에 아직 등록을 못 하고 있으면서 수중에 돈이 떨어졌다고 몇 끼를 굶고 있는 광경을 보고 나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같이 굶기도 한 일이 있는가 하면 거리에 나가 가장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이 그 당시 100원에 10개 주는 밀가루 빵이어서 가끔 단골 메뉴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이야기는 학교 등록금을 내야겠는데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국회의원 선거를 한 후 국회의원 당선자 사진집이 예쁜 종이에 잘 인쇄된 것이 있어서 이를 몇 장 사들고 시골로 내려가 군청이나 경찰서 등 큰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고학을 하는 학생이라고 소개하고 그것을 드리고 학비를 조달했던 일은 참으로 내 일생에 귀중한 체험의 하나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고생과 체험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속담에 젊어서 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경험들이 내 인생 항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남북을 오고간 사진에 얽힌 이야기다. 내가 원하던 음악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생을 낙으로 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면서도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 생각만은 언 한 시간도 잊어본 일은 없었다. 그 당시에는 남북 간에 편지만은 왕래가 되고 있어서 혹시나 하면서도 내가 인천 월미도에서 찍은 사진을 동봉한 안부 편지를 북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며 회신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북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가족사진과 안부 편지가 온 것이다. 이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며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사진에는 튼튼하게 자라나는 세 아이들의 모습과 아내 그리고 어머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부친께서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도 있었다. 나는 그때 왕래한 사진들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어느 날 뜻밖에도 어머님께서 나를 보기 위해 그 위험한 38선을 넘어 불원천리 멀다 않고 서울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는 생명이라도 바치겠다는 각오로 그 위험한 길을 오셨다고 생각할 때 참으로 어머님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어렵게 오신 어머님을 따뜻하게 모시지도 못하고 내 처지가 그러하기에 추운 겨울 내가 들어 있던 덕영학사 즉 적산가옥(일본식 건물) 2층 난로도 없는 다다미방에서 오돌오돌 떠시게 한 것이 고작이었다. 어머님께서는 그래도 아들이 만학이나마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에 만족하시며 며칠간 같이 계시다가 이제 또 다시 나의 처자와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 역시 어머님을 그냥 혼자서 가시게는 할 수가 없어서 황해도 옹진 쪽에서 북한으로 넘어가는 38선까지 만이라도 전송하기 위해 동행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과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겠지만 바로 이것이 한 가족이 남북으로 헤어져 있기에 있을 수 있는 생사를 초월한 삶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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