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선 서울 근교 수색에 사는 같은 고향 박천 분이신 김득열 씨 댁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하고 있었다. 그 작전 방법이 상대방에게 위협을 주면서도 공포감을 조성하는 전술이었다. 즉 요란한 포성을 가끔 한 번씩 내면서 먼 산 정상에는 유엔군이 일렬로 줄을 서서 행진을 하는 것이다.
그 광경을 멀리서 본 인민군은 공포에 질려서 계속 후퇴를 하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너무나 기쁜 마음에 집안으로 들어가 곧 수복하게 될 유엔군과 우리 국군을 환영하기 위해 태극기를 내 손으로 그렸던 것이다. 정말로 희비가 엇갈리는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아군이 완전 수복을 하고 그 김득열 씨는 그곳 치안대에 나가 잠시 동안이나마 치안 일을 보아주기도 하였다. 나는 전쟁이 터지고 서울을 떠날 때 쌀값이 하도 비싸던 생각이 나서 연백에서 가지고 온 좁쌀 두 말을 자전거에 싣고 서울에 가서 팔기로 하였다.
좁쌀 값으로 많은 돈을 받게 된 나는 물욕이 생겨 이왕이면 이런 장사를 한 번만 더 한다면 상당한 돈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수색으로 돌아와 다시 시골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가는 길 옆에서 아군 폭격기에 맞은 쌀장사들의 사람 살려 달라는 비명소리가 비통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때 서울의 쌀값이 그렇게 비싸니까 사람들이 리어카나 자전거 등으로 쌀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UN군은 전략상으로 길에 그러한 물체가 보이면 무조건 기관총으로 쏘아대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가다가 소위 쌕쌕이라는 제트 폭격기 한 대가 나를 향해 쏜살같이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어느 집 나무 더미 뒤로 피신해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간신히 모면하고, 수색으로 급히 돌아와 다시는 그런 허황된 욕심은 부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바 있다.
드디어 서울까지 완전수복이 되었다. 내가 있었던 하숙집을 찾아갔다. 하숙집 주인 내외도 무사하고 하숙집 가재도구와 나의 책이며 소지품도 그대로 있었다.
그 후 나는 그곳에서 얼마동안 있었는데 아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하여 평안북도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는 승전보가 들려왔다. 그러한 기쁜 소식을 접한 나는 이번에는 기어코 가족이 있는 신천까지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가는 교통편은 연백에서 타고 온 튜브 없는 자전거를 완전 수리를 해 타고 서울에서 신천까지 3일 만에 올라가 가족과 헤어진 지 4년 만에 재상봉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부친께서는 수년 전에 별세하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른 가족들, 어머니와 처 그리고 세 아이들은 그 위험한 전쟁 속에서 집 주위 건물들이 무수하게 폭격으로 황폐화되었음에도 건강하게 잘 있었고 또 척서리에 있는 주택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모두가 그동안 우리 가족들이 착하게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라고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나는 마치 개선장군 모양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는 듯했다. 동네사람들과 친지들은 우리를 부러워했고 우리가족은 자랑스럽고 돋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서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곳 중고등학교에서는 음악교사로 나와 달라는 요청을 해 와 약 1개월간 학교에 나가기도 하였다.
나는 가족으로부터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들었다. 우선 제일 괴로웠던 것이 보안대에서 나를 붙잡기 위해 요주의 대상 가족으로 정하고 수시로 집을 방문하고 때로는 밤 1시나 2시에 와서 구두 신은 발로 집안까지 들어와 집안 곳곳을 뒤지기도 하며 나의 유무와 행방을 조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아내는 서로 말을 맞추어 항상 일관성 있게 내가 고향인 평안북도 박천으로 운수사업을 하러 갔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답변을 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월남을 하였다면 월남가족으로 낙인을 찍어 모든 면에서 더욱 불리하게 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수시로 있었던 모든 노력동원에 나가야 하는 일은 여자들만이 살아가는 가정에서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런 저런 고생을 감수하면서도 꿋꿋하게 가정을 지켜 온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은 자랑스럽기만 하였다.
또 하나의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내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38선을 넘어와 나를 만나보고 다시 돌아가신 일이 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내는 어머니가 무사히 다녀왔으니 자기도 다녀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38선을 넘어 월남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그 전에 어머니를 안내했던 그 할머니를 만나게 되어 월남에 대한 방안을 세우고 그 할머니를 따라 38선 접경지까지는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 3살 난 금숙이를 업고 보따리 하나를 가지고 갔었는데 보따리에는 옷가지와, 용돈이 될 수 있는 비단 약간과 나의 옷이 한 두 벌이 들어 있었고 몸에는 그전 화폐개혁을 하며 무효화시킨 구 화폐 약간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구 화폐는 북에서는 화폐개혁으로 인하여 못 쓰게 되었지만 남에서는 그때까지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곳은 38선 접경지대라 월남자들에 대한 보안검사가 심하여서 아내는 월남 용의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일차 조사에서 다행히 화폐만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월남하려는 자로 의심이 되었기 때문에 우선 공민증(주민등록증)과 보따리를 압수당하고 2일간이나 수차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세 살 난 아기도 있고 어떤 큰 현행범도 아니기 때문에 공민증과 보따리는 추후 집으로 보내 준다는 조건으로 귀가조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