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그곳 신천 보위부에 수차례에 걸쳐 출두하여 심한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조사 받은 내용은 애가 월남했다는 사실을 알아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했고 심지어는 내가 월남했다는 것을 자백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노골적인 심문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월남하였다는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나의 친구라는 사람, 즉 내가 그전 신천에서 부친을 도와 상업을 할 때 그 옆집 염료상회 점원이었던 자가 그 보위부 간부로 있는 것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이 보위부에 왔느냐는 물음에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래도 좀 친소관계가 있다는 덕분으로 그 후에는 다행히도 공민증을 돌려받고 모든 것이 일단락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끈질기게 월남자를 조사하고 월남가족을 요주의 대상자로 지목 조사를 하여 왔던 그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은 아군이 북진을 하고 인민군과 공산도당들이 도주를 하게 되자 공산당은 그동안 자기들에게 반역을 한 인물들을 색출하여 처형을 했다는 소식은 참으로 처참하기만 하였다. 이번에는 반대로 아군이 진주하고 인민군이 후퇴하자 그곳에 조직된 임시치안대들은 그간 악질적으로 공산당에 부역한 자 수 백 명을 색출해 처형하고 그 처형한 시체를 시내 어느 곳에 대형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모두 매장해 버렸다는 것이다.
아군이 잠시 동안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하면서 이러한 사건들이 각지에서 일어났었는데 특히 신천 사건은 그 규모와 방법이 대범하고 잔인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수의 복수가 오고간 것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크나큰 비극의 역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동안 공산 정권에 대한 염증과 유엔군 진주로 인해 공산당에 대한 반감행위 등이 드러난 약간의 노약자를 제외한 청장년 대부분은 집과 재산을 고스란히 버리고 일제히 대 탈출을 하였는데 이 사건을 소위 1.4 후퇴라고 한다.
나도 역시 그리웠던 가정으로 돌아가 전시(戰時)이기는 하였지만 조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는가 했으나 불과 1개월 정도 되어서 또 다시 대 탈출과 피난생활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후퇴한다는 말을 듣고 거리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밖으로 나가 보았다. 사람들은 벌써 길이 메일 정도로 자기의 능력 한도까지 짐 보따리를 지고, 이고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6.25 전쟁이 일어나던 그때 누구보다도 실감나는 경험을 했었기 때문에 피난길에는 우선 무엇보다도 최소한 얼마동안이라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어떤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일부 농터에서 얻은 쌀이 꽤 있었고 또 소규모 장사를 하다 남은 비단종류가 약간 있었다. 쌀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는 소달구지가 필요했다. 마침 같은 교회에 나가는 백 집사라는 분에게 집사님의 요구대로 쌀을 드리겠으니 소달구지 하나만 구해달라고 제안을 했다. 그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재령에 가면 소가 있다며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백 집사와 나는 약속을 하고 이른 아침 30리나 되는 재령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여 형편을 알아본 결과 그곳도 마찬가지로 소를 가진 사람은 벌써 피난을 떠난 후였다. 하는 수 없이 허전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옆에 버려진 테구루마(손수레) 하나가 있어 그것이라도 필요할 것 같아 끌고 오기로 하였다.
갈 때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이었으나 돌아오는 길은 배도 고프고 또 손수레를 하나 끌고 오기 때문에 몹시 힘들고 피곤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오는 것을 신천온천까지 와서는 더욱 허기가 지고 기운이 빠져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었다. 그래 체면 불구하고 어떤 집을 찾아 들어갔다. 그 집에서도 역시 온 가족이 피난 준비를 하고 출발 전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또 한 번 실례를 무릅쓰고 식사를 좀 얻어먹고 힘을 내어 집에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다.
돌아와 보니 아내는 아이들 셋을 데리고 짐 보따리를 두 개나 가지고 어떤 지면이 있는 분이 짐을 실어다준다고 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먼저 떠났다는 것이다. 나는 약간 서운하기는 했지만 하는 수 없이 무사히 잘 가기만을 기원했다. 그리고는 나도 가지고 온 손수레에다 우선 쌀 한 가마와 약간의 취사도구 등을 싣고 나는 끌고 어머니는 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해주 방면으로 출발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 집 문전에는 임자 없는 빈 소달구지 하나가 있었다. 그러나 소가 없으니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을 하며 얼마 동안을 가고 있는데 어떤 시골 할아버지 한 분이 작은 소 한 마리를 끌고 가족들과 같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제안하기를 내가 빈 달구지 하나가 있는데 이 소를 메워 거기에 우리 두 집의 짐을 싣고 가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선뜻 동의를 하지 않았지만 수차 설득을 시키고 양해를 얻어 우리 집 앞에 버려진 달구지가 있는 곳까지 돌아와 그 달구지에 소를 메워 양가의 짐을 싣고 다시 피난길을 떠났다.
신천에서 해주까지는 150리 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고 지고 가는 것보다는 훨씬 쉽게 해주까지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가는 동안 일어난 사건들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다.
피난민 인파는 150리나 되는 그 길을 꽉 메우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유엔군 폭격기들은 그 피난민 대열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해대는 것이다. 이유인즉 피난민 행렬 속에는 인민군대가 섞여 있다는 인식을 하고 그들의 진군을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였다.
길 가운데에는 폭격을 맞아 죽은 시체가 군데군데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시체를 치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계속 밀려가는 피난민들은 시체를 발로 밟기도 하고 시체를 타고 넘어가기도 하였다.
게다가 공중에서는 폭격기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모습은 마치 실제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저 유엔 폭격기가 설마하니 피난 가는 우리 평민들에게 폭격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피난길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